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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23장- 일체 선법

자수향 2009. 1. 15. 22:02

수습지관좌선법요 (修習止觀坐禪法要) 29


금강처럼 견고한 마음으로
제법실상 관찰해야 불도 성취

호흡 등 다섯 가지 조건 조화돼야
지관 삼매에 쉽게 들어갈 수 있어

제4장 조화(調和) ①

夫行者初學坐禪 欲修十方三世佛法者 應當先發大誓願 度脫一切衆生 願求無上佛道 其心堅固 猶如金剛 精進勇猛 不惜身命 若成就一切佛法 終不退轉 然後坐中正念思惟一切諸法眞實之相 所謂善ㆍ不善ㆍ無記法 內外根塵妄識 一切有漏煩惱法 三界有爲 生死因果法 皆因心有 故十地經云 三界無別有 唯是一心作 若知心無性 則諸法不實 心無染著 則一切生死業行止息 作是觀已 及應如次起行修習也

‘다섯 욕구를 꾸짖는 장(訶五欲)’에서는 외부 오진경계에 끌리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였고,‘다섯 번뇌를 버리는 장(棄五蓋)’에서는 내적으로 마음이 청정한 것에 대해 말하였다. 이와 같이 내적으로의 마음과 밖으로의 오진이 청정해야 만이 편안한 마음으로 지관을 수습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알맞게 조화가 이루어져야만 수행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 때문에 네 번째로 다섯 가지 일을 조화하는‘조화장’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섯 가지 조건이란 몸 호흡 마음 수면 음식 등을 가리킨다.
시방삼세 제불법이란 보리 열반 구경청정 중도제일의제로서 위없는 오묘한 법을 말한다. 여기에서 말한 불법은 구계중생(九界衆生)의 법으로 비할 바가 아니다. 중생법은 오염된 번뇌법으로써 청정하지 않고 미혹하며 어두운 법이다. 오직 불법만이 구경이며 깨달음이며 불생멸이며 청정한 법이다. 따라서 수행자가 시방삼세 일체제불의 법을 배우고 닦으려 한다면 반드시 우선적으로 사홍서원의 발심을 일으켜야만 한다.

사홍서원의‘가없는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끝없는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라고 한 이 두 구절은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는 대목으로서 이타대비심에 소속되고,‘한없는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위없는 불도를 이루오리다’라고 한 이 두 구절은 위로 불도를 구하는 대목인데, 이는 자리로서 큰 지혜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사홍서원이란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통해서 자리이타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위없는 불도를 구하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를 발원하오리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일체’라고 하는 두 글자는 불계(佛界)를 제외한 구계중생 모두를 포괄한다.

육도 유루법은 여섯 갈래의 범부중생이고, 출세간의 성문과 연각승은 이승중생이며, 보살은 대도심(大道心)중생이다. 따라서 이 같은 구계중생을 모두 해탈시키기를 발원한다는 뜻인 것이다.

‘불도’란 깨달음의 도이다. 다시 말해서 제불여래가 깨달은 도는 그 누구도 능가할 수 없다. 때문에 최후까지 증득하기를 발원한다는 뜻에서‘위없는 불도’라고 했다.

수행자는 이와 같은 마음만을 발심할 뿐만 아니라 그 마음이 금강처럼 견고해야만 한다. 금강은 지극히 견고하고 날카로워서 모든 사물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금강처럼 견고해서 파괴되지 않는 마음을 발심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고 용맹정진하면서 끝내 물러나지 않고 오직 위없는 불도를 구해서 일체중생을 광대하게 제도해야만 한다. 이 같은 사람을 가리켜 불법 가운데서 가장 건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불퇴전(不退轉)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위불퇴(位不退)인데, 수행인의 공부가 진보할 경우 삼계내 견혹과 사혹을 끝까지 다 끊어지면 육도범부의 분단생사에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다. 이를 두고 ‘위불퇴’라고 말한다.

두 번째는 행불퇴(行不退)인데, 수행인이 공부가 심오하게 진보하면 삼계 내의 견혹 사혹만 끊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삼계 밖의 한량없는 미세한 번뇌인 진사혹(塵沙惑)까지도 조복받고 끊을 수 있다. 이 같은 경지에 이르면 보살의 수행지위에서 영원히 퇴전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행불퇴’라고 말한다.

세 번째는 염불퇴(念不退)인데, 수행인이 공부가 더더욱 심오하게 진보하여 진사혹마저 다 끊고 근본무명번뇌까지를 타파할 수 있다면 중도정념에서 영원히 물러나지 않게 된다. 이를 두고 ‘염불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수행을 성취하려면 단정히 앉아 지관을 수습하면서 일체제법의 진실한 성품을 무념인 정념으로 사유해야만 한다. 진실한 모습이란 실상을 말하며, 실성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상(相)’자는 본성[性]의 의미이다. 이러한 실상은 무상이면서 상 아닌 것도 없고 실성은 무성이면서 성 아닌 것도 없다. 이를 두고 진실상, 또는 진실성이라고 말한다.

제법이란 일체 선법과 불선법을 모두 포괄해서 하는 말이다. 선법은 유루선법과 무루선법이 있고 중도선이 있다. 불선법은 악법인데 탐 진 치를 말한다.

또 무기법(無記法)이 있는데, 이는 기억해서 구별하지 못하는 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 선도 악도 아니고 혼침도 산란도 아니면 명료한 무기법이지만, 마음이 애매모호하고 어두워 종일토록 어둠 속에서 나날을 보낸다면 이는 우리의 청정한 본성을 덮어버리는 껌껌한 무기법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제법의 진실한 성품을 알 수 있겠는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유루 번뇌법은 생사인과법으로서 모두가 마음으로 인해서 있는 것이므로 중생들이 분별하는 마음의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이는 중생분별심이 근원이 돼서 제법의 자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망심이 없다면 만법의 차별도 없다. 이 때문에 마음은 만법의 근본이 된다. 능엄경에서는“모든 법은 마음을 따라서 일어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체 인과와 세계미진은 마음이 자체를 이룬다. 그 때문에“삼계는 별다른 것이 없고 오직 마음으로 조작됐을 뿐이다”라고 했다.

마음을 떠난 밖에 따로의 법이란 없으며 법 밖에 마음도 없다. 마음이 바로 법이며 법이 바로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과 법은 본래 두 모습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마음을 따라서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만 한다.

가령 목전에 육진경계가 없다면 마음도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때문에 마음은 본래 일어난 일이 없는데 경계로 인해서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경계가 없을 땐 마음도 역시 없다. 이는 이른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갖가지 법이 따라서 일어난다”라고 한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문제를 추구하면 마음과 경계가 내적으로 육근에서 일어나지 않고, 밖으로 육경에서도 일어나지도 않으며, 육근과 육경이 화합해서 공동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며, 허공처럼 아무런 원인 없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 당체는 본래 고요하다. 내 마음이 자성이 없다면 제법도 역시 실제하지 않고 제법이 본래 실체가 없다면 자기의 마음도 역시 실재가 없다. 따라서 실체가 없는 성품을 진실성, 또는 진실상이라고도 부른다.

이미 이와 같은 제법실상을 올바로 사유했기 때문에 마음에 번뇌의 집착이 없다면 육진경계를 탐애하는 마음도 없게 된다. 이것으로 부터서 일체의 생사업을 모두 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무시이래로 항상 생사의 세계에 유전하는 것은 번뇌와 업이 활동하면서 그치지 않는 것이 그 원인인 것이다.

수행인이 일체경계에서 이를 간파하지 못하기 때문에 허망하게 번뇌 집착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번뇌생사의 인과관계이다. 그 때문에 생사가 단절되지 않는다. 따라서 수행인은 자기의 마음은 끝내 얻지 못하고 일체 제법은 허망하여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심오하게 관찰하고 일체 생사업의 활동을 쉬어야만 한다.

일체 목전의 모습은 모두가 내 마음은 허망한 분별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 모습들은 진실한 모습이 아닌 것을 실상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