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향 2009. 1. 15. 22:06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 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우리들의 진실 생명 자리는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이므로 적멸한 자리이고 평등한 자리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또한 보리의 자리입니다. 거기에는 높고 낮음이 없는데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칭찬에 크게 기뻐할 것도 없고 비난에 심하게 굴욕감을 느낄 것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이야말로 진실로 좋은 마음, 바로 청정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에서 말하는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과는 구별이 되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진실하고 올곧은 행동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뭔가의 선법을 닦고 난 뒤 스스로 흐뭇해하는 흔적이 남아 있으면 청정한 마음이 못 되는 것입니다. 물에 비친 달과 같은 마음, 텅 빈 마음으로 일체 경계에 매이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고 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무심으로 선법을 닦고, 열심히 선법을 닦으면서도, 닦음이 없는 무심의 도리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도 없고 너도 없지마는 나 자신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또 너를 위해서도 살뜰하게 보살펴 줄 줄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지마는 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기도 해야 합니다.

부처의 세계에는 온전히 부처밖에 없고, 꿈을 깬 사람에게는 전부 사실 밖에 없지마는 그러면서도 제도할 중생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을 불교에서는 가관, 공관, 중도관의 삼관이라고 합니다. 이 삼관은 나 자신과 사물을 이해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관점입니다. 팔만 사천 법문이라는 불교의 입장도 다 이 삼관으로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假觀은 세속적인 관점으로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홍서원을 할 때 ' 衆生無邊誓願道' 라고 합니다. 이것은 미혹한 중생들이 많으므로 제도해야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사실은 잘못 본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중생들이 많으므로 이 모습에서 바라보고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空觀은 중생도 공하고 부처도 공하여 성인도 없고 범부도 없다는 시각입니다. 설사 열반보다도 더 수승한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공한 것으로 볼 줄 아는 시각입니다. 사실 모든 것이 空입니다. 물질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의 세계, 감정의 세계 모든 것이 실체가 없고 비어 있다는 시각입니다.

中道觀은 공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래 부처인 중생을 제도한다는 시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대로 된 사홍서원을 하려면 '본래 부처인 중생을 맹세코 건지리이다' 해야 합니다. 이 말 속에는 심오한 불교의 경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무아, 무인, 무중생, 무수자로써 선법을 닦는다는 것은 바로 이 중도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무상을 말하니까 공관이기도 하지만 선법을 닦는 입장에서는 중도관이라 하겠습니다.

"수보리야, 말한 바 선법이라는 것은 여래가 설하되 곧 선법이 아니고 그 이름이 선법이니라."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卽非善法 是名善法)

선법이란 수양을 하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는 법으로서 흔히 오계와 십선을 말합니다. 오계는 첫째, 산 목숨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不殺生), 둘째,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함부로 훔치지 않는다(不貪盜), 셋째, 자기 남편, 자기 아내 이외에는 간음하지 않는다(不邪淫), 넷째,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不妄語), 다섯째, 술을 마시지 않는다(不飮酒)입니다.

화엄경에서 야마천궁회에서는 보살들이 행해야 하는 열가지 행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홉번재 행이 선법행인데 이것도 열 가지이기 때문에 十善이라고 합니다. 첫째, 일체 중생을 위해서 집이 된다. 둘째, 일체 중생의 구호가 된다. 셋째, 일체 중생의 귀의처가 되리라. 넷째, 일체 중생의 존경스러운 인도자가 되리라. 다섯째, 일체 중생의 스승이 되리라. 여섯째, 일체 중생의 등불이 되겠다. 일곱째, 일체 중생의 광명이 되겠다. 여덟째, 일체 중생의 어리석음을 떠나게 하는 횃불이 되겠다. 아홉번째, 일체 중생의 밝은 빛이 되리라. 열번째, 진실행을 하리라. 이러한 행을 실천함으로써 점차 부처님을 닮아가고 진실해진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깨달음으로 가는 길로 계,정,혜의 삼학과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의 육바라밀을 실천행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것을 선법의 기준으로 삼더라도 매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무심으로 해야 합니다.  선악시비를 가리는 데 있어서 어떠한 절대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선이 될 수 있는 것이 저기에서는 악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법을 닦는다 하는 분별 의식과 상을 가지면 선법을 선법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무심히 행할 때에 선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단지 그 이름을 선법이라고 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