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옮기기 5회 (09.3.3)
(2) 정각
일구 월심 사유하던 성자에게
모든 존재가 밝혀진 그 날,
그의 의혹은 씻은 듯 사라졌다.
연기의 도리를 알았으므로. (『自設經』 1:1 보리품)
사캬족의 아들 고타마는 마가다 국에 머물면서 7년 동안이나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고자 온갖 정성을 다 바쳤다. 그런 끝에 라자가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루베라의 네란자강 기슭에 있는 팝파라 나무 밑에서 마침내 그는 크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그 나무를 보리수라고 불게 되었고, 그 깨달음을 보리소 밑의 정각 또는 대각 성취라고 일컫는다.
그것은 그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와 아울러 불교의 모든 흐름이 그 순간에 결정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하여 이루어졌는가? 또 어떤 사상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가? 무릇 불교에 대해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도 아닐 수 없다. 이것을 이제 나는 새로운 시각에서 구명해 가고자 한다.
여기에서 내가 취택한 경전(자설경)은 그 결정적 순간의 그의 모습과 생각을 묘사한 다음 앞에 둔 운문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 나는 그 운문을 될 수 있는 대로 직역해 놓았거니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열심히 사유하는 성자에게 삼라 만상이 그 진상을 드러냈을 때 의혹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주의해서 읽어보면 ,여기에 불교의 진리에 대한 견해가 명료히 나타나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무명'이라는 말을 음미해 보자. 이 말의 원어는 avijja 이며 그것은 무지, 미망을 나타내는 말이거니와 ,그것을 표현하는데 "무"를 뜻하는 'a'와 '명'을 뜻하는 'vijja'를 연결했다는 것은 무지란 곧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후세의 불교문헌들은 이런 생각을 '광명이 오면 어둠이 사라진다.'는 비유적 표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십이장경」의 일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저 도를 봄은 마치 횃불을 가지고 어두운 방에 들어 갈 때,
그 어둠이 없어지고 광명만이 남는 것과 같으니라."
또 후세의 선승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지관타좌 ( 只管打坐;선종의 말, 오직 앉는 것 뿐이라는 뜻, 즉 좌선에 임해서 깨닫겠다든지 무엇을 해결하겠다든지 하는 노력을 떠나 무심히 그저 앉아 있을 때 그것이 도리여 참된 경지가 된다는 뜻) 하여 신심탈락 ( 身心脫落: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떠나는 것)할 때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러서 (도홍유록 挑紅柳錄에서 나온 말; 진리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바로 진리라는 뜻,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말)
삼라만상은 그 진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 보인다고 한다.
이런 것이 불교를 일관하는 진리관이다. 이것은 고독한 사색가가 그 머리 속에서 얽어 낸 종류와는 다르다. 또는 흥분한 예언자가 갑자기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과도 다르다. 오직 사람이 아무것에도 가리어지지 않은 눈을 뜨게 될 때 일체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 그 진상을 우리의 눈 앞에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법실상(모든 존재의 진실한 모습)이며 이것이 불교의 진리관이거니와 이런 진리의 관념은 결코 불교 만의 것은 아니다. 그리스 사상가들이 말하는 진리의 관념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들은 진리를 '알래테이나 aletheia'라는 말로 나타냈다. 그것은 '덮혀있는 것 letheia에 부정의 접두사 ',a'를 붙인 것이어서 '덮여 있지 않은 것'을 뜻한다. 거기서도 역시 가려 있지 않은 존재의 진상이야 말로 진리라고 생각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면 대체 사캬 족의 아들 고타마는 어떻게 함으로써 가려지지 않은 눈을 얻었고, 어떻게 함으로써 존재의 진상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도 과거에는 보리수 밑에서의 결정적인 순간에만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7년에 걸친 긴 수행을 별로 돌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이제 새로운 시각으로 이것을 규명해 보겠다는 것은 마지막의 크나큰 해결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시 한번 이 장기에 걸친 수행을 돌보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긴 수행기간은 내 관점에서 본다면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그 첫째는 출가의 단계이다.
오래된 경전은 자주 "집에서 나와 집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쓰고 있다. 그것은 가정생활을 버리는 것과 함께 가사를 걸치고 사문으로서 살아감을 뜻하는 바 그 속에는 적어도 두 가지 포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 하나는 풍족한 가정생활의 포기요, 또 하나는 고귀한 사회 생활의 포기이다. 고타마의 가정 생화응 부유하고 행복했으며 그 사회적 신분은 크샤트리아에 속해 있었다.
만약 마음만 있었다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을 자진하여 버렸다는 것은 쉽지 않은 포기였음이 분명하다. 유럽의 불교 학자가 고타마의 출가를 번역하면서 자주 '크나큰 포기(the grerat Renunciation)'라는 말을 쓴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크나큰 포기'에 의해서 그는 우선 가정과 카스트의 속박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둘째 단계는 여러 도인들을 찾아 공부한 기간이다.
오래된 경전에는 아라라카라마와 웃타카라마풋타가 그의 스승이 되었다고 나와 있다. 그들은 두 사람 다 이른바 육사외도(붓다 당시의 여섯명의 사상가, 그것이 정도가 아니라 하여 불교 쪽에서 이렇게 부르는 것)에는 들어 있지 않으나, 그들 또한 그 당시 마가다국을 중심으로 활약했 던 새 사상가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낡은 사상의 계보에 속하는 바라문('바라문'을 가르킴이니, 인도 고대의 정통적인 종교 절대자인 브라만과이자 아트만의 합치를 주장했다)을 찾았다는 기록은 전혀 안 보이므로 그가 어디까지나 새로운 사상의조류 속에서 호흡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