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옮기기 20회(09.3.18)
이런 귀의의 심정은 이를테면 예수가 "나를 따르라"고 하자 곧 예수를 따라 나섰던 열 두 제자들의 그것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고 해야겠다. 또 후세의 정토종(아미타불의 서방정토에 태어 나기를 원하는 종파,혜원이 창시자) 신자들처럼 그 도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대로 불지와 본원(本願; 붓다가 보살 적에 중생을 위해 세운 서원)의 불가사의 함을 믿으려 들었던 태도와도 다르다 하겠다. 붓다의 제자들이 붓다를 따르게 된 동기는 결코 단순히 붓다의 인간적인 권위 낲에 머리를 숙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함물며 보지않고 믿는다든지 불합리한 까닭에 믿는다든지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경전이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는 것에 의하면 그들은 "이미 법을 보고, 법을 얻고, 법을 알고, 법을 깨닫고, 의혹을 풀어서" 이것 아니고는 내가 갈 길이 없다고 확신 함에 이르러 비로서 붓다를 따른 것이다. 즉, 그들의 귀의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 납득, 확신 위에 입각한 귀의였다.
그러면 그 가르침은 어떤 성격을 띄고 있었던가? 이 장의 첫 머리에 인용한 글은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열거 하였다.
1)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것.
2)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3)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4) 잘 열반에 인도할 수 있는 것
5)지혜있는 사람이면 각기 스스로 알 수 있는 것
첫번째의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것"이란 말은 '현견(現見)'이라고 번역되듯이 ,'현실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붓다의 가르침은 철두 철미하게 이 현실에 입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붓다가 "이는 고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현실임에 틀림없다. 보이지 않는 신을 믿어라
또는 천국이 가까와왔다고 하는 따위의 말과는 다르디. 또 "이는 고의 멸진이다."라고 말하고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할 때 그것들은 모두 현실의 문제이니까 눈을 떠서 그 현상을 직시한다면 누구라도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볼 수 있고 현실적으로 증험할 수 있는 것이겠다. 만약 붓다가 어떤 환상 속에서 말했던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현실에서 보고 증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는 그 설하는 내용이 사후의 문제와 관련이 되고 미래의 일에 미치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오직 "보지 않고 믿을'수밖에 없을 것이고, 혹은 "불합리 하므로 믿는다'"고 고백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붓다를 따르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보고 증험함으로써 그 가르침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붓다의 가르침이 지니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성격을 볼 수 있다.
또 두번째의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이라는 표현은 흔히 '즉시적'혹은 '현생적'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것은 과보 즉 성과가 나타나는 시기의 문제이다. 만약 붓다가 설한 것이 하느님나라의 도래에 관한 것이 었다면 , 그 성과는 그것이 도래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 그것이 내세왕생(천상세계에 가서 태어남)에 대한 가르침이었다면 그 과보는 유명을 달리하는 날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은 때를 격하지 않고 바로 현재에 과보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행이 이에 관해서 언급한 경이 있다. [상응부경전]에 '우파바나'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서 우파바나라는 제자가 그것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대덕이시여, 현생적인 법, 현생적인 법 합니다만, 대체 어떤 것이 현생적인 법이겠습니까?"
이에 대해 붓다는 인간의 감각 기관과 그 대상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생기는 집착을 보기로 들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파바나여, 여기 한 사람의 비구가 있어서 눈을 들어 무엇을 보았다 하자,
또 그는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염심(染心;악에 의해 더러워진 마음)을
일으켰다고 치자. 그때 그는 스스로 반성함으로써 '아,내 속에 염심이 있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파바나여, 그것이 현생적인 법이니라.
우파바나여, 그런데 여기 또 한 사람의 비구가 있어서 눈을 들어 무엇을 보았다하자.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염심을 일으키지 않았다 치자, 그때
그는 자기 마음을 돌아보고 '아, 나는 염심이 없구나.'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파바나여, 이것이 현생적인 법이니라."
붓다와 그 제자들의 관심사는 결국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 였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을 변화 시키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전환시키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정신을 차려서 돌아보기만 한다면 자기의 상태를 똑똑히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집착을 안고 있는 내 마음의 움직임과 집착을 떠난 내 마음의 편안함이 그대로 이해되기 마련이다. 미망으로 뒤덮혀 있는 마음의 어두움이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에 의해 홀연히 개어 가는 모습도 알 수가 있다. 이런 모양을 "어둠 속에 불을 가져와"라고 설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