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조사는 최상승이고 아라한은 소승인가 4
발제자는 남북양전통의 수행의 출발을 팔정도에서 찾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다른 다르침에서도 해탈을 말하지만 팔정도는 없다고 하셨다. 팔정도는 쉽다면 가장 쉽고 어렵다면 가장 어려운 것일 것이다. 팔정도는 매 찰나 찰나에 삶과 직면하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진지한 삶, 성숙된 삶, 치열한 삶을 구현하는 게 팔정도일 것이다. 대승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보살행을 팔정도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보살행이라는 산냐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최고의 보살행이라면 보살행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선종도 최상승이라는 이름으로 대승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했고 그 최상승이란 내용을 보면 보살행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몇몇 남방 학자들은 중국 선종은 대승불교 속의 테라와다(Theravada, 상좌부)라고 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달마스님은 觀心一法이 總攝諸行이라 하여 이 마음을 통찰하는 것을 선종의 근본 모토로 제시하셨다. 본 금강경은 산냐를 척파하는 이 가르침이야말로 최수승승이며 최상승이라고 설하고 있으며 이런 연유로 선종의 소의경전이 되었다. 이것은 마음 하나를 다스리는 것이 전쟁에서 수천의 적과 싸워이기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법구경의 가르침과도 상통하며 마음을 통찰하는 학문[心學]이라고 불리는 아비담마를 근본으로한 남방 위빳사나 수행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러면 과연 무엇을 근거하여 우리는 조사는 최상승이고 아라한은 소승이라 하겠는가? 我空法有이므로 소승이다하면 남방 스님들은 웃는다. 어느 남방의 스님도 제법무아를 역설하지 않는 자는 없다. 이것은 그냥 대승에서 아비담마를 비하하기 위해서 붙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힌두 학자들이 불교는 무아니까 아무것도 없는 데서 유가 생겼다고 하니 논리적으로도 모순이요 허무주의의 가르침이라고 선동하는 것과 같은 발상으로 남방불교를 폄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남방은 분석을 중시하고 북방은 직관을 중시한다. 분석은 직관으로 완성되지만 분석이 없는 직관은 설 자리가 없다. 직관만을 강조하다 보면 진아나 불성이나 자성청정심이나 원각본성에 계합한다는 비불교적인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발상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한국불교는 性이라는 것을 내세워 그것과 합일하거나 그것의 은총으로 살 것을 설하는 힌두교의 아류라고 하면 너무 심한 말일까?
너무 이런 것을 강조하다보면 한국불교 수행을 너무 비판하여 한국불교의 간화선법을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이 수행법을 따르는 분들의 거부감이 강할 수 있음을 발제자는 안다. 발제자는 나름대로 화두에 의심이 발하여 모든 것 팽개치고 출가하였다. 위빳사나 수행도 나름대로 해보았지만 화두에 대한 인연이 치성?하여서인지 발제자는 구지 말하자면 간화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해야한다. 호리유차에 천리현격이라 했다. 실재론적인 사고를 철저히 털어내지 못한다면 간화선은 우빠니샤드적이 될 소지가 많고 지금 많은 수좌들이 이렇게 수행하고 있음을 발제자는 지적하고 탁마하고 싶다.
제방에서 아주 많은 수좌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라마나 마하르시(Ramana Maharshi)의 책을 돌려가며 읽고 ‘이뭣고’화두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 최고의 간화선의 지침서로 까지 거론하는 자들이 제법 많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힌두의 수행법과 간화선을 구분짓지 못하고 불교 수행의 이름으로 힌두수행을 하고 있다면 이 어찌 불조가 통탄할일이 아니겠는가? 힌두와 불교의 출발은 자아와 무아이다. 무아에 사무치지 않고서는 불교 수행이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선종의 소의경전인 우리의 금강경이 그것을 거듭 설하고 있지 않은가. 산냐는 극복해야하지만 性을 부정하면 허무주의가 된다고 한다면 저 힌두적 발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발제자는 금강경에서 4상․9상으로 정형화하여 척파하고 있는 이런 모든 존재론적인 발상을 깨끗이 쓸어버려야 비로소 간화선은 활발발하게 나아간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불성 자성 법성 따위의 性이라는 산냐 하나 극복 못하면서 어찌 수처작주하고 살불살조한단 말인가?
생멸을 거듭하는 현상 뒤에 놓여있는 그 무엇을 사량하지말자. 그것이야말로 지혜롭지 못한 사유(ayonoso manasikaara, 如理作意가 아님)요 사량분별의 실체이다. 그것을 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성이라는 이름으로 진아니 대아니 하는 이름으로 세우지 말자. 세우면 그것과 합일하려 몰입하게 되고 몰입하다가 지치면 그것에 대한 헌신을 생각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이 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금강경은 이런 것을 척파하고 있다. 그러기에 최상승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금강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너무도 비불교적이고 비금강경적으로 불교를 가르치고 배우고 비불교적으로 수행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금강경결제에 임하면서 반성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