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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물갈이’, 그 천박함에 대하여

자수향 2009. 3. 21. 13:20

강남경찰을 물갈이 하겠다고 했다. 그러다 잠잠해졌다. 이번에는 보조금 담당 사회복지 공무원 3천명을 물갈이 하겠다고 한다.

먼저, 경찰의 물갈이에 대하여 정리해보자.

경찰 물갈이론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8년에도, 강남지역 경찰서 장기 1,008명을 대거 강북으로 이동시켰다. 2003년에는 분위기를 쇄신한다며 강남ㆍ서초서 경찰관 231명을 강북의 경찰관들과 맞바꿨다. 알고보니 역사적 선례가 있는 일이다.

 

2009년 2월 27일 서울경찰청은 “강남·서초·수서서에서 8년 이상 근무한 경위급 이하 직원들을 다른 경찰서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3월 16일 강희락 신임 경찰청장은 전원 물갈이가 아니라 선별 교체론으로 최종 정리했다. 그래도 물갈이론은 부분적으로 살아있는 셈이다.


다음으로 사회복지 담당 공무원들의 물갈이다.

행정안전부는 20일 사회복지 지원금 횡령 비리를 확인‧예방하기 위해 현 소속 부서에서 2년 이상 근무한 담당 공무원을 같은 시.군.구 내의 다른 부서나 읍.면.동으로 전환배치하라고 각 지자체에 권고했다.

행안부 조사 결과, 현재 전국의 사회복지 담당 공무원은 1만114명으로, 이 가운데 한 곳에서 2년 이상 근무한 직원이 30.4%(3천77명)로 집계됐다. 무려 3천명이 물갈이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물갈이론은 타당할까. 합법적일까.

첫째, 경찰은 98년에도, 2003년에도 이른바 강남지역 경찰들을 물갈이 했다. 그럼에도 또 다시 물갈이할 필요가 발생했다. 이걸 누구 탓이라고 해야할까. 사람 탓인가, 지역 탓인가, 아니면 구조 탓인가. 근본적인 문제해결 없이 그때그때 미봉책으로 사람만 확 바꿔버리면 된다는 것인가. 왜 강남은 그렇게 ‘물좋은 동네’여야만 하는가. 왜 강남에만 물갈이의 필요성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충분히 문제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고, 그 원인에 따른 대응을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집중적으로 청문감사관을 운영한다할지, 구조적인 유착관계를 집중적 단속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물갈이만 하면 한 5년 정도는 그대로 넘어가니까 그렇게 처리하면 된다?

둘째, 앞선 맥락에서 구조적인 문제를 공무원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사회 환경 책임인지, 구조 책임인지, 아니면 개인 책임인지를 분명히 해야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구조 탓인데 공무원 개인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책임을 묻는다? 이것은 원인과 책임의 불일치라서 전혀 대응이 되지 못한다. 나아가 강남에 근무했다는 이유만으로, 단지 하위직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범죄자로 혹은 잠재적 비리공무원으로 낙인찍는다. 진짜 잘못한 사람은 찾아내지도 못하고, 단지 그 모집단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물갈이 하겠다는 것은 책임을 희석시키고, 범죄자들을 도리어 안도하게 한다. 억울하게 당한 사람은 세상을 불신하게 되고, 도매금으로 운 좋게 넘어간 사람은 ‘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구나’라며 법치를 조롱한다.


셋째, 비리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제대로 감사를 해야지 물갈이를 통해 그 사람을 그 자리에서 몰아낸 다음 비로소 확인하겠다는 발상은 역시 법치주의가 아니다. 그 사람이 남기고 간 흔적을 통해 비리의 단서를 찾아내겠다는 건 역시 모두를 의심하고 모두를 뒷조사 하겠다는 일종의 ‘초감시 사회‘의 징표에 불과하다.

넷째, 헌법적으로도 직업공무원제와 충돌한다. 공무원의 신분보장은 공무원의 임용은 물론 보직인사에 있어서도 능력주의와 합리적인 징계절차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공무원의 신분보장은 곧 직업공무원제의 뿌리이다. 안정적인 신분보장, 예측가능한 인사이동 이런 원칙에 대한 위협은 곧 직업공무원제의 중대한 도전이다.

다섯째, 공무원의 신분보장은 공무원의 생활안정과 직결된다. 생활의 안정은 단순히 퇴직시키지 않은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정된 보직기간 동안 예정된 출근지에서 안정적으로 생활하는 것까지도 의미한다. 왜냐하면 공무원의 생활범위 및 직무범위가 근무지를 중심으로 형성되게 된다. 대개 근무지가 정해지면, 가까운 데로 이사를 하거나 자녀들의 교육환경도 그 주변을 중심으로 형성되게 된다. 직장의 안정은 곧 생활안정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러한 생활안정이 직업공무원제도의 안정으로 직결된다. 그런데 도저히 예측이 불가능하고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사유로 사실상의 정실인사 내지는 물갈이 인사가 이루어진다면, 이는 공무원의 안정성이나 정치적 중립성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발상이야말로 대한민국에만 있는 지극히 천박한 인사제도이자 방침의 하나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마치 청계천 철거민을 성남으로 내쫓듯, 군사작전 중의 하나로 소개작전을 벌이는 것과 뭐가 다른가. 군사문화의 유산이다. 불도저 정치다. 개별적 특성, 다양성, 다원주의를 무시하는 획일주의의 정치문화다. 과거 잘못된 군사문화가 행정에까지 전염돼 지극히 천박한 인사행정이다. 당장 멈춰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