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금강경결제발제문-초불연

26회 마음에 잡도리함[如理作意]의 중요성 2

자수향 2009. 3. 31. 17:14

이런 점들만 봐도 요니소 마나시까라가 얼마나 중요하게 설해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발제자는 내 안에서 꾸살라 담마(kusala-dhamma, 善法)가 일어나는가 아니면 아꾸살라 담마(불선법)-여기에 대해서는 6장 11번 주해 참조-가 일어나는가를 근원적으로(지혜롭게) 잘 의근(mano-indriya)에 잡드려 꾸살라면 증장하도록 노력하고 아꾸살라면 없애도록 노력하는 데서 불교 수행의 출발은 시작된다고 본다. 이런 미세한 살핌이 없으면 수행에서 오는 조그마한 지견, 조그마한 견처, 조그마한 경계-이 모두는 산냐로 표현된다-에 속아서 그것을 자기 밑천으로 삼아서 속아 살다가 귀중한 한 평생을 다 보내고 만다고 생각한다.(선불선에 대해서는 제8일에 다루도록 하겠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마노(mano, 意)는 참으로 중요한 기능을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인도의 다른 제 종교나 사상과 다른 또 하나의 측면은 바로 이 mano의 천명에 있다고도 하겠다. 다시 부연하건대 이 마노가 단순히 아야따나(āyatana, 處)로서의 기능만 하게 되면 안팎의 여섯 감각 기관과 여섯 대상이 맞부딪쳐 촉·수·애·취·유·생·노사우비고뇌로 연결되는 윤회의 장(場, āyatana는 역시 장의 개념이다)이 될 것이고 이 마노가 인드리야(indriya, 根)로서의 기능을 할 때는 마노는 향상근이 되어 마음챙김의 힘으로 저 해탈 열반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나시까라 특히 꾸살라와 아꾸살라를 잘 살펴서 꾸살라는 증장시키고 아꾸살라는 소멸하게 하는 이 요니소 마나시까라는 바로 마노가 향상근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하는 제일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하겠다.

이런 작용을 팔정도에서는 정정진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정정진이 밑바탕이 되어서 바른 마음챙김(正念)이 더 깊어지고 이리 되면 바른 선정[正定]이 되어 사선(四禪)이 확고하게되어 제 4선에서 우뻬카(upekkha, 捨, 평온)와 사띠(sati, 念, 마음챙김)가 완전히 청정하게 되어(pārisuddhi, 빠리숫디) 그 힘으로 번뇌를 멸절하여(漏盡) 저 해탈 열반을 성취한다. 이것이 초기경들에서 부처님께서 거듭 설하시는 불교의 수행이라고 발제자는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런 밑바탕에는 팔정도의 처음인 정견(正見)이 항상 함께 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 이런 정견을 확고부동하게 하기 위해서 산냐를 척파하는 본 경이 설해지게 된 것이다.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우리 불자들 중 많은 분들이 아직도 이 요니소 마나시까라(지혜로운 주의=체계적인 사유)와 수행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화두 하나만 타파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중도를 벗어난 극단적인 산냐에 사로잡혀서 사유라는 말만 들어가면 알음알이를 굴리는 것 정도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화두에 좀 집중된다 싶고 무념무상에 조금 계합된다 싶을 때는 수행이 다 된 양 의기양양하다가 그렇지 못하면 전혀 상식밖의 어처구니없는 판단과 행동을 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볼 수 있다. 아니 그런 것을 수행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조계종에서 지난 수십 년간 수없이 연출해낸 여러 작태들의 근원에는 이처럼 두 쪽이 나버린 수행행태가 놓여 있지는 않는가 하고 발제자는 반성해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