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옮기기 36회
그러면 눈을 돌이켜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해 놓은 글을 검토해 보자.
그것은 자푸카다카라는 외도가 사리푸타를 찾아와서 벌인 문답이다. 그 사람은 낡은 주석에 의하면 사리푸타의 조카라고 되어 있거니와, 어쨋든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이인 듯해서 잔푸카다카가 불교의 기본적인 개념에 관해 꼬치꼬치 물은 데 대하여 사리푸타는 하나하나 명쾌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 대답은 붓다의 설명 방식과는 약간 달라서 정의적, 주석인 점은 있으나, 역시 붓다의 수제자답게 참으로 명쾌하다고 하여야겠다. 그런 질문과 대답이 열 여섯개의 경에 기록되어 그것들이 일련의 경군(經群;염부거상응)을 이루고 있거니와, 그 첫째 경의 내용이 이 열반에 관한 문답이다.
흔히들 열반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대체 무엇을 말함이냐는 것이 이 외도의 질문 내용이었다.
"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멸, 노여움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것을 일컬어 열반이라고 한다."
그러변 거기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이냐고 다시 질문을 받은 사리푸타는 이렇게 대답했다.
"벗이여, 이 성스러운 팔정도야 말로 그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정견, 정사, 정어, 정업,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
그리고 사리푸타는 "벗이여, 이것은 선한 길이다. 노력할 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말을 덧붙혔다.
참으로 명쾌한 주석서에서, 열반에 관한 설명은 이것으로 충분한 것 같다. 여기에 딴 말을 덧붙인다는 것은 오직 그 개념을 애매모호하게만들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현대의 학자로서 한 가지만 거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현대의 학자로서 한 가지만 거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에 의해 현대인들은 어쩌면 열반의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비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인간의 이상을 생각해 낸 것은 결코 불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이런 이상이 불교만의 주장이었다면 우리는 도리어 의심스런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그 관념을 검토해 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널리 세계의 온갖 사상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불교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는 것이라 하겠다.
그 중에서도 언어 표현상 가장 비슷한 것은 스토어(stoa)의 철인들이 인간의 이상적인 경지라고 생각한 '아파테이아(Apatheia)'의 관념이다. 그들도 또한 인간의 불행은 격정(Pathos)에 의해 이성이 방해되고 영혼이 구속됨으로써 생긴다고 보았던 것이다.그리하여 이 격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상태를 최고의 이상이라 여겨, 그것을 아파테이아라고 불렀다.
또 그리스의 에피쿠로스가 '아타락티아(ataraktia)'라고 부른 경지도 그것에 가깝다. 그것은 어지로움이 극복된 내적 평화의 상태를 말한다. 저 쾌락주의자들이 그려 낸 인간의 최고 경지가 이런 것이었다는 것은 퍽 재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다시 근대에 와서 칸트가 말한 '자유'의 개념 또한 같은 개열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그는 실천 이성(의지)이 자기 법칙을 따를 때 그것이 자율적 자유요, 이와 반대로 자연적 욕망에 지배될때 그것은 방종의 타율이라고 했다. 그런것에서 우리는 열반의 생각과 입장을 같이하는 사고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이다.
일찍이 붓다는 어떤 경([상응부경전] 1:63 갈애)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갈애에 의해 인도되고
갈애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는 것,
갈애야말로
일체를 예속시킨다.
붓다가 열반을 말씀할 때, 결국은 이런 예속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공적무위(空寂無爲)의 소극적인 경지라고 할 수 없다. 거기서 불이 꺼진 듯이 소멸되어야 하는 것은 갈애이다. 그리고 번뇌의 불꽃이며,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일 뿐이다. 인간자체가 여기에서 "소멸하여"어딘가에 가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여기 이 땅에 있는 것이다. 그를 예속하던 갈애가 소멸됨으로써 그는 완전한 자유와 안온 속에서 여전히 살아 가는 것이다. 진리의 길, 평화의 길을 ,그리고 그것이 열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