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향 2009. 4. 6. 10:25

아마도 이 마지막 말씀같은 것은 좀 차갑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니것을 뒤집어 놓고 보면, 여기에는 붓다의 진면복이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아가서 본질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겠다.

 

"나는 오직 길을 가르쳐 주는  이"라는 말씀을 뒤집어 놓고 볼 때, 붓다는 결코 전지 전능의 구제자가 아님이 명백하다. 또 신과 사람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중계자도 아님을 알 수 있다.따라서 믿음을 고백하고 이 사람(붓다)만 예배하면 그것으로 구현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붓다의 진면목은 스스로 인생의 과제를 해결하고 정도를 실천하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너희도 이렇게 인식하고 이렇게 실천하여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라고 가르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붓다의 진몀목은 도사인 점에 즉 실천의 선구자요 안내자인 데에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결국 그 지혜와 실천에 대한 책임은 붓다가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 개개인에게 돌아 갈 수 밖에 없다. 눈을 떠서 존재의 진상을 보는 것은 그들 자신이어야 하며 마음을 다해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도 그들 자신이어야 한다. 일찍이 붓다는 성구를 외는 사람들을 비판하여 "남의 소를 세는 것과 같다."고 한 적이 있다. 자기 자신이 지혜의 눈을 뜨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 대해 만년의 붓다는 자주 다음과 같이 설하여 제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너희는 이에 자기를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아,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며, 또 법(진리)을 섬으로 삼고 의지처로 삼아,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라."

 

 

여기서 섬이라고 한 것은 강의 한가운데 또는 바다의 섬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모든 것이 유전하는 한가운데서 의지할 수 있는 곳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요지는 확고한 의지처란 자기 자신과 법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말한다면 법에 의해 제어되는 자기, 그것 밖에는 이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에 대해 [법구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자기의 의지처는 자기 뿐이니

저 밖에 또 무엇을 의지하리오.

자기가 잘 조어되는 때

얻기 힘든 의지처를 얻으리로다.

 

 

불교란 본래가 이런 가르침이다. 이것을 현대적 개념으로 나타낸다면 붓다가 설하신 것은  결국 자가 형성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형성의 길에는 이것이면 그만이라는 따위의 한계는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저 사라쌍수 밑에 누워 장차 크나큰 죽음 (대 열반)에 들려던 붓다가 그 제자들에게 남기신 최후의 말씀은 [대열반경] 속에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그러면 비구들아, 나는 너희에게 이르리라. 모든 것이 변화하느니

라 , 불방일하여 정진하도록 하라."

 

 

 

(10) 문답식

 

 

 

"소나여, 어찌 생각하느냐? 색(물질)은 불변하는 것이겠느냐,

변화하는 것이겠느냐?"

"대덕이시여, 변화하는 것입니다."

"만약 변화하는 것이라면 괴로움이겠느냐, 즐거움이겠느냐?"

"대덕이시여, 괴로움입니다."

"만약  변화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을 관찰하여 "이는 내 것이다,

이는 나다. 이는 나의 본질이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덕이시여, 그럴수는 없습니다."

 

                                                                          ([상응부경전] 22:49 輪屢那(륜루나) 한역동본, [잡아함경]1:30  륜누나)

 

 

붓다는 매우 자주 제자들을 문답으로 이끌어 갔다. 그런 몇가지 보기를 앞에서도 든 바가 있거니와 나는 이 문제와 관련시켜 붓다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볼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런 문답에는 지혜의 스승으로 붓다의 면목이 참으로 선명하게 반영되어 있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