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회-무아를 잊어버린 한국불교는 힌두교의 아류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1
무아를 잊어버린 한국불교는 힌두교의 아류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제법무아를 확신하는 자가 보살이다.
[문맥]
17-7. “수보리여, 보살이 ‘법들은 자아가 없다, 법들은 자아가 없다’고 확신할 때 그를 여래 아라한 정등각은 보살 마하살이라고 부른다.”
[鳩摩羅什]
須菩提야 若菩薩이 通達無我法者는 如來가 說名眞是菩薩이니라
[玄奘]
善現. 若諸菩薩於無我法無我法深信解者. 如來應正等覺說爲菩薩菩薩.
거듭 말하지만 금강경은 중생이니, 무상정등각이니, 보살이니, 불국토 건설이니 하는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개념들을 거론하고 이런 것들이 고정불변의 진리로 정해져 있다는 생각을 거듭해서 척파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제법무아의 불교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가르침을 제기하면서 여기에 확신을 가져서야 그를 일러 보살 마하살이라 한다고 통쾌하게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모두 우빠니샤드의 아류적인 발상으로 참선을 하고 불교를 설하고 있지는 않은가. 마음, 마음 하지만 그 마음을 아뜨만적인 견해로 받아들여 가르치고 있지는 않은가. 우빠니샤드의 아류적인 발상으로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생명자리인 자아(ātman)가 있나니 그것을 찾기 위해서 생명을 걸자고 힘으로 몰아붙이고 있지 않은가? 참으로 이러한 힘의 논리를 앞세워, 화두를 힘으로 밀어붙여 타파해야 할 그 무엇으로 간주하여서 온 몸과 마음을 몰아세워가고 있지는 않은가? 힘으로 밀어붙여 화두가 핵폭발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에 펑하고 터지면 그 즉시에 도인이 되고 부처가 되어 만중생의 존경과 귀의와 찬탄과 예경을 받게 되는 것으로 돈오돈수를 생각하고 있지나 않은가?
조금 거칠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한국불교의 수행에는 이러한 허망하기 짝이 없는 힘의 논리가 너무나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그게 자아든 불성이든 대아든 진아든 진인이든 자성이든 주인공이든 내 부처든 불생불멸이든 공이든 그 어떤 존재론적인 무엇을 상정하여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려고 몰입하면 아무래도 힘으로 그것을 향해서 밀어붙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점점 극단적인 신비주의로 빠져들게 되니 바른 수행은 아니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업이 되면 매사가 그런 힘을 쓸려는 강력한 의도에 지배되어 정념정지(正念正知) 즉 살피는 기능이 개발되지 못해서 경계에 속게 될 것이다. 아니, 건전한 상식이나 경우를 무시하고 세상사 모두를 힘으로 밀어붙여 해결하려 들게 될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조계종의 여러 문제는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역자는 반성해본다.
그런데 설사 힘으로 밀어붙여 그것과 하나가 되었다고 위대한 선포를 하더라도 기실 그것은 그것과 하나 되었다는 산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경은 설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어떤 영원한 무엇이 있다.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견해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알아야 하겠다. 그래서 본 경은 거듭해서 그런 것이 없다고 제법무아를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음미해야할 점은 15-1 등에서 확신이 부족한 중생들은 이 법문을 들을 수가 없다고 이경을 수지독송하고 해설하는 공덕이 많은 이유를 들고 있으며, 다시 14-2에서는 산냐를 여의하는 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미래세의 중생들은 최고로 경이로운 자들이라고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거듭해서 이 가르침은 최상승과 최수승승에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자, 무상의 큰 보리심을 발한 자를 위해서 설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냥 신에 의지하고 불보살님께 의지해서 한 평생 편안하고 즐겁게 세상을 살려고 생각하는 자들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자리, 지고의 아뜨만, 사량분별로는 미칠 수 없는 궁극의 경지 등등을 추구하여 그것을 구경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그런 수행자들마저도 듣고는 두려워할 그런 가르침을 설하고 계신다. 그들에게 “그런 것은 오직 산냐일 뿐이다. 그것마저도 척파해야 할 것이다.”라는 엄청난 대 사자후를 하고 계신 것이다. 참으로 위없는 보리심을 낸 자가 아니면 듣고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러한 가르침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다른 보석을 갈아서 감정해낼 수 있는 금강석, 저 다이아몬드와 같은 것이라 부른다. 아니면 그러한 금강석, 다이아몬드까지도 능히 잘라버릴 수 있는(chedika) 보석 중의 보석, 보석이라는 이름마저도 붙을 수 없는 그러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니 모든 것을 쳐부수어 버리는 벼락과도 같은 가르침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가르침을 수지독송하고 이해하여 남에게 설해준다면 어찌 그 공덕을 물질적인 공덕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금강경은 여러 비유를 들어가며 설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