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향 2009. 4. 21. 08:29

그리고 이런 고백이 수계, 즉 교단의 일원이 되는 주요한 의식으로 채택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그때 붓다의 제자는 60명에 달했으므로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그들을 각처에 보내 그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도록 했다.

이것을 나는  '붓다의 전도선언'이라고 부르거니와 그리하여 파견된 비구들은 귀의하여 출가하고자 하는 사람이 생겼을 경우 그들을 붓다 앞에 데리고 와서 그 허가를 받을 핑요가 있었다. 먼 고장 에서 그 일 때문에 일일이 찾아와야 한다는 것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붓다는 심사 숙고한 끝에 비구들에게도 수계, 즉 출가를 허가하는 권한을 주었다.

 

"비구들이여, 나는 허락하노니, 너희는 각자 먼 고장에 있어서, 출

가시키고 구족계( 불교교단에 들어오는 허가)를 주라.

비구들이여, 출가시키고 구족계를 주는 데는 이렇게 함이 좋도다.

먼저 머리와 수염을 깍고 가사를 입고 윗옷을 한 쪽 어깨에 걸치고

비구의 발 밑에 절한 다음 꿇어 앉아서 합장하고 이렇게 말하게

하라. '佛에 귀의하나이다. 法에 귀의하나이다. 僧에 귀의하나이다.

또다시 佛에 귀의하나이다. 法에 귀의하나이다. 僧에 귀의하나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삼귀의를 세번 부르는 것으로 출가시키고 구

족계를 줄 것을 허락하노라."

 

불이니, 세존이니, 여래니 하는 것은 교조인 붓다를 가르키는 말이다. 법이란 물론 붓다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승이라 함은 승가즉 불교 교단을 뜻하며 그 원어는 samgha이다. 이 불 법 승은 불교의 세 기둥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세 보배 즉 삼보라고 한다. 이것들에 귀의한다는 것은 삼보를 오직 의지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불교에서 가장 종교적인 특색이 발휘된 것은 이 삼귀의에 있다고 해도 좋으리라고 믿는다.

 

전 세기 전방부터 점차 불교, 특히 원시 불교의 진상을 이해하기에 이른 유럽의 학자들은 자주 불교의 중요성에 대해 왈가 왈부하며 논쟁을 벌여왔다. 기독교의 전통 속에서 살아온 그들로서는 불교가 어째서 종교일 수 있는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으리라. 그들의 선입견에 의하면 종교란 신과 인간의 관계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 그들 앞에 나타난 불교는 아무래도 그런 기준에 맞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신이니 구제자니 하는 것은 없었다. 이것이 어떻게 종교일 수 있는가? 그들이 당황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어떤 학자들는 "불교는 종교를 무시한다."고 했고 또 어떤 학자는 "불교는 기도가 없는 도덕체계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종교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런 그들의 단정은 이제와서 돌이켜 볼 때 매우 재미있는 점이 없지 않다고 하겠다. 불교가 종교를 무시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처음에는 도덕 체계이던 것이 차츰 종교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런 생각은 결국 그들의 좁은 종교관의 틀 속에 어떻게 하든 불교까지도 욱여 넣으려고 한 데서 비롯된 견강 부회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