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아함경이야기'-마스타니 후미오

이야기옮기기 56회(09.4.23)

자수향 2009. 4. 23. 09:08

그 두 가지 길이란 물론 바라문들이 행하는 제사를 주로 하는 신앙과 붓다가 설한 출가 수행의 길이었지만, 아난다로서는 이 기회에 그 바라문으로 하여금 인정케하려고 한 것이겠다. 그러나 바라문의 입장이 되고 보면 , 그런 고백은 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는 다만

 

" 고타마와 아난다와 같은 이는 참으로 내가 존경하는 바요, 찬탄하는 바요."

 

라고 말함으로써  아난다의 추궁에서 몸을 사리려 들었다. 아난다는 거듭

 

"바라문이여, 나는 그대가 누구를 존경하고 누구를 찬탄하고 있는가

물은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두 길 중에서 그대가 어느 것을 우월하다고

생각하는지 그것을 물은 것이다."

 

라고 추궁했으나, 바라문은 여전히 그것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그런 응대가 두 사람 사이에 세 번이나 되풀이 되는 것을 보고 붓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바라문이여, 오늘 왕궁에서 화합이 있는 듯하거니와 무엇이 이야기되었는가?"

 

화제가 바뀌어서 한숨을 돌린 바라문은 살아났다는 듯이 명랑한 태도로 대답했다.

 

"고타마여, 오늘의 화합에서는 신통의 문제가 화제에 올랐습니다.

옛날에는 사문은 적었어도 뛰어난 신통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문의 수효가 엄청나게 많으면서도 신통력을 가진

사람이 적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리하여 좌석의 분위기가 약간 풀리자 붓다는 그 신통력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통력이란 말은 기적의 뜻이어서 어느 사람으로서는 생각조차 못할 엄청난 능력을 발휘함을 이름하거니와 그것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붓다는 말문을 열었다. 그 첫째는 신통 신변(神通 神變), 둘째는 기설신변(記說神變), 셋째는 교계신변(敎誡神變) 그리고 붓다는 그 하나 하나에 대해 설명을 했다. 그것을 요약해 보면 이렇다. 먼저 신통신변이란 문자 그대로 기적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공중을 난다든지, 물 위를 걷는다는지, 허공에 앉는다든지 하는 기술을 말한다. 그것들은 결국 "환상 비슷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설명을 듣고 난 바라문의 소감이었다.

 

다음으로 기설신변이라 함은 예언을 이름이다. 이를테면 점을 쳐서 미래를  예언한다든지, 신의 계시에 따라 닥쳐올 일을 말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그런 일들도 역시 환상같은 것이어서 그 당사자에게만 통할 뿐이라는 것이 바라문의 감상이었다.

 

마지막의 교계 신변이란 경전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너희는 이렇게 탐구하라. 이렇게는 탐구하지 말라.

이렇게 사색하라. 이렇게는 사색하지 말라. 이것을 끊어라.

그리고 이것을 체득하라."

 

는 식으로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을 구태여 신통이니 신변이니 할 필요도 없겠고, 붓다가 평소에 그 제자나 신자를 상대로 살아온 생활이야 말로 바로 그것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붓다는 그것을 이제 신변 신통이라고 일컬어, 기적, 예언과 어느 쪽이 나은지를 바라문으로 하여금 판단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 그 바라문은

"아, 고타마여, 나는 마지막 신변을 가장 위대하다고 봅니다.

세 가지 신통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묘하고 희유한 것은

그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그는 그 자라에서 삼귀의를 부르고 붓다에게 귀의 했다는 것이 이 경의 결말이다.

 

지금까지 다루어온 경들에 비할 때 이 경은 꽤 길어서 여기서는 다만 뼈대만을 소개한 데 지나지  않지만 그 요점을 말하자면 대략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첫째 부분은 그 바라문의 힐난하는 듯한 질문과 그것에 대한 붓다의 대답이었다. 둘째 부분은 아난다와 바라문 사이에 벌어진 문답이며, 셋째 부분은 붓다가 세 가지 신통력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그 바라문을 귀의시킨 대목이다. 그리고 그 전체를 일관하는 주제는 결국 붓다의 가르침이 한 사람을 위하는 길인가, 아니면 여러 사람을 위하는 길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문제를 둘러 싸고 후대의 불교 내부에서 이른바 '대승과 소승의 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 대승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마치 이 바라문처럼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도에 전념하는 비구들의 태도를 자기만을 위하는 길이라 하여 비난하고 이타행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물론 그들이라 해도 붓다 당신을 논란의 대상으로 삼지는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비위에 맞도록 경전을 숱하게 만들어 가는 동시에 아라한트(arhant-SKt)즉 아라한과 성문, 연각을 공격했던 것이다. 아라한이란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깨달은 성자이며, 성문이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도하는 사람 ,연각이란 붓다의 가르침에 의함이 없이 스스로 깨닫는 사람을 가리키는바, 그들은 자기의 해탈에만 전념할 뿐  다른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 대승 쪽의 주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