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다팡하(11,12,13,14,15)
밀린다팡하(11) 해탈한 사람의 시간
해탈한 사람에게는 시간이 어떻게 존재할까?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비구에게 시간이 존재하느냐고 묻는다. 비구는 "존재하는 시간도 있고 존재하지 않는 시간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다시 왕은 "어떤 시간은 존재하고 어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비구는 존재하는 시간과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대해서 설명한다.
지나가 버렸거나 없어져 버린 과거에 대해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결과를 낳거나 결과를 낳을 가능성을 갖거나 딴 곳에 다시 태어날 것에 대해서는 존재합니다. 죽어서 딴 곳에 다시 태어나게 될 사람에게는 시간이 존재하며 죽어서 다시 딴 곳에 태어나지 않을 사람에게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자유롭게 해탈한 이, 완전히 열반에 이른 사람에게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해탈과 열반을 얻은 이들은 시간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비구에게 시간의 근거를 물었을 때 비구는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외웠다. 우주의 최초 문제, 시간의 기점 문제를 이야기하다 보니 이 십이연기에 나오는 미혹한 무명(無明)의 뜻에 따라서 시간은 순환적이므로 우주 최초라든지 시간 기점은 정할 수가 없다는 관점에서 시간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하게 되면 시간과 관련한 십이연기의 해석이 달라져야 한다.
이때에는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등의 윤회(輪廻)적 연기로 인해 시간이 있게 된다고 보아야 한다. 십이연기를 혹(惑), 업(業), 고(苦) 삼도로 줄인다면 미혹과 악업과 고통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이 혹업고(惑業苦) 삼도를 뒤집으면 법신(法身)과 반야지혜(般若智慧)와 해탈수행(解脫修行)의 삼덕(三德)이 된다. 이 삼덕에서는 시간이 없어진다. 미혹의 세계에 시간이 있는 것이지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없어진다.
불교의 모든 중요한 교리나 사상에서는 실체적인 시간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실체를 부정하는 공(空)사상이나, 모든 것을 주관적으로 지어서 본 바일 뿐이라고 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사상에서도 다 같이 시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시간은 우매한 범부중생이 [나]라고 하는 것이나 [내 것]이라고 하는 것에 집착함으로써 생긴다고 보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생각이 없는 바위에게는 천년만년 동안 세월의 풍화작용을 겪으며 형태가 변하더라도 특별히 붙잡거나 그리워해야 할 시간이 없다. 또 설사 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교에서는 그 시간의 줄을 타고 시간의 줄 위에서 영원을 얻으려고 하거나 모든 시간을 다 밟아서 영원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어느 한 순간의 일념(一念)에서 영원을 찾으려고 한다. 마치 한 모금의 바닷물에서 모든 바닷물의 맛을 다 보듯이 말이다.
해탈은 불교의 이상이므로 불교에서는 궁극적으로 시간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마느냐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나가세나 비구는 어떤 사람에게는 시간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시간이 없다고 한다. 업(業)을 짓고 사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있고 업을 짓지 않고 수행해서 해탈한 사람에게는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업을 짓는 사람의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미혹과 집착에서 스스로 지어보는 것일 뿐이다.
불교의 이상은 시간을 지우는 것이다. 시간을 지우기 위해서는 나와 내 것이라는 자기중심적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바위에게 시간이 없듯이 우리에게도 시간이 없어진다. 불교의 이상은 무량겁(無量劫)을 살아서 영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한 모금의 바닷물에서 이 세계 모든 바닷물의 짠맛을 알 듯이 한 순간의 일념에서 무량겁의 시간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밀린다팡하(12) 알고 짓는 죄-1
불자들을 만나면 먼저 불명을 묻게 된다. 가끔 불명이 있음직한 분들이 불명을 일부러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오랫동안 불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왔고 또 신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명이 없는 것이다. 그런 분들의 지론은 이렇다. "불명을 받으려면 계를 받아야 하고 계를 받으면 지켜야 하는데 아직까지 내 자신은 계율을 지킬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윤달이 든 해에는 여러 곳에서 보살계를 설한다. 그런데 불자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는데도 계를 받지 않은 분들이 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깨끗하게 살고 양심적으로 살고자 하는 결벽증이 있는 분들,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고 좀 편하게 불교를 믿고 싶어하는 분들, 실천적으로 불교를 믿는 것은 연기한 채 지식적으로 불교를 알고 싶어하는 분들이 주로 수계식에 동참하기를 피하는 것 같다. 일부러 계를 받지 않는 분들 마음속에는 '알고 죄를 지으면 그 죄가 더 크니까 죄를 지을 바에야 모르고 짓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이 깔려 있다.
밀린다 왕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가세나 비구에게 묻는다.
"스님, 알면서 악행을 짓는 사람과 모르면서 악행을 짓는 사람과는 누가 더 큰 과보(果報)를 받습니까?"
"모르면서 악행을 짓는 사람이 그 악행의 과보로 받는 화가 더 큽니다."
왕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우리 왕자나 대신들이 모르고 잘못을 범한다면 그들에게 보통 사람 갑절의 벌을 내려야겠군요."
왕의 이 말에 대답하지 않고 비구는 왕에게 반문한다.
"대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뜨거운 화로를 한 사람은 모르고 잡았고 다른 한 사람은 알고 잡았다면 어느 쪽이 더 심하게 화상을 입겠습니까?"
"그야 물론 화로가 뜨거운 줄 모르고 잡는 사람이 더 심한 화상을 입겠지요."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악행이 나쁜 줄을 모르고 범하는 사람에게 그 악업에 대한 과보의 화가 더 큰 것입니다."
화로가 뜨거운 줄 아는 사람은 설사 그것을 들더라도 빨리 놓아버린다. 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자기가 간경화증에 걸려 있는 것을 알면 술을 끊게 된다. 사냥이나 낚시를 취미로 가진 사람도 살생이 나쁜 것을 알게 되면 마음속에서 살생하는 자신의 행위와 살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양심의 소리가 서로 대치하게 된다.
그래서 짐승들을 죽이더라도 덜 잔인하게 죽일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면 사냥하거나 낚시하는 횟수가 줄어들 수도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이는 일을 그만둘 수도 있다. 훔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계를 받으면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하더라도 몇 가지라도 지켜보려고 시도할 수 있다. 받은 계를 한 가지도 지키지 못하더라도 지켜보려는 마음이라도 낼 수 있다. 계를 지켜보겠다는 마음조차 떠오르지 않으면 계라는 말을 한번쯤 생각할 수 있는 기회라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계를 설하는 스님들께서는 계를 받는 것이 좋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앉아서 계를 받고 서서 계를 파하더라도 계를 받는 편이 좋다.'고 가르친다. 앉아서 받고 일어서면서 그 계를 잊어버릴지라도 받는 동안에 계에 대해서 생각한 공덕과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음성을 녹음하면 녹음이 되고, 녹음하지 않고 귀를 통해서 듣기만 하더라도 그것이 항상 기억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떠오를 때가 있다. 계에 대해서 지나가는 소리로 한번 듣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 한 알의 씨앗을 심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은 시간의 길고 짧음이 있을 뿐이다. 동쪽으로 기운 나무는 언젠가 동쪽으로 넘어진다고 했다. 계의 방향으로 기운 마음은 언젠가 계를 의지하게 될 것이다.
밀린다팡하(13) 알고 짓는 죄-2
좋은 방향으로 마음을 내는 것이 계의 문제에만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불법을 배우고 불법을 닦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미혹을 반야지혜로 돌리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참다운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골치 아프게 여겨질 수도 있다. 인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다보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너무 무의미하게 여겨진다. 자기 인생의 무의미함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두려워서 참다운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피할 수도 있다.
참다운 삶의 길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설사 올바른 길을 따르지 못하더라도 알아두는 편이 더 좋다. 사람들이 전생의 업에 따라서 또는 사람들의 근기(根機)에 따라서 불도를 구하고 닦는 것에 열심히 하거나 소홀히 하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참다운 삶의 길로 방향을 잡으면 언젠가 그쪽에 이르게 된다.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비구는 알면서 악행을 하는 것과 모르면서 악행하는 것의 차이를 말했지만 이 논법을 선행 쪽으로 옮기면 그 이익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곰의 쓸개가 입에 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몸에 이로운 줄을 알면 사람들은 그 쓴맛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먹으려고 할 것이다. 적절한 운동을 하는 것이 몸에 좋은 줄을 알면 걷는 것이나 일하는 것을 좀더 좋아할 수도 있다.
인내하는 것이 힘들지만 그 결과가 보람있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좀더 인내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선행이 좋다는 것을 알면 그 선행을 제대로 실행치 못할지라도 선행의 좋은 점을 전혀 모를 때보다는 선행을 좀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는 악이 악인 줄 알고 행하면 행하는 것보다 그 과보의 화가 덜하고 선이 좋은 줄을 알고 행하면 모르고 행하는 것보다 그 과보의 이익이 더욱 많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밀린다 왕은 약간 각도를 달리해서 "선행의 과보로 얻는 공덕과 악행의 과보로서 받게 되는 죄과는 어느 쪽이 더 크냐?"고 묻는다. 어떤 이가 어려운 사람에게 빵을 한 조각 주는 선행을 베풀었다. 동시에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빵 한 조각을 빼앗는 악행도 지었다. 선행과 악행 중 어느 쪽의 효력이 더 크냐는 물음이다.
나가세나 비구는 "선행을 하는 쪽의 복이 더 큽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이유를 묻고 비구는 대답한다.
"대왕이여, 죄를 짓는 사람은 자기의 악행을 알아차리고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행을 한 죄과는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선행을 한 공덕을 지은 사람은 절대로 그 선행에 대해서 후회하는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선행으로 인해 자기에게 기쁨과 환희가 생겨 몸이 편안해지고 안락함을 가집니다. 선행의 공덕은 계속 증대됩니다. 예를 들면 손발이 잘릴 정도의 중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처님께 꽃을 바치게 되면 91겁 동안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똑같은 정도의 선행도 짓고 악행도 지었을 경우 선행의 공덕은 더욱 커지고 악행의 죄과는 더욱 줄어드는데 그 이유는 선행은 좋은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후회하지 않아서 점점 더 선행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악행을 지은 다음에는 후회하게 되니까 점점 더 악행을 멈추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악행은 많이 하고 선행은 적게 했다고 하더라도 선행의 공덕이 악행의 공덕을 억누르게 된다. 손발이 잘릴 정도의 벌을 받으려면 어떤 정도로 나쁜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설사 사형을 당할 정도의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부처님께 꽃을 올리는 공덕을 지으면 91겁 동안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덕은 계속적으로 더욱더 커지고 악행의 죄업은 점점 더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밀린다팡하(14) 고통을 맞을 준비-1
'왜 지금 불법을 닦아야 되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불교가 고통의 뿌리를 뽑기 위한 것이라든지 생사에서 벗어나기 의한 것이라든지 영원한 목숨을 얻기 위한 것이라든지 또는 보살행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때 지금 이 순간에 고통을 느끼거나 죽음이 두렵거나 자비심이 일어나지도 않는데 왜 지금 불법을 닦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생긴다. 또 고통에 대비하는 방법도 문제가 된다.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비구에게 묻는다.
스님, 불법을 닦는 사람들은 고통의 뿌리를 뽑아 버리고자 한다는데 과거의 괴로움을 버리기 위한 것입니까? 미래의 괴로움을 버리기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현재의 괴로움을 버리기 위한 것입니까?
나가세나 비구는 불법을 닦는 것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고통을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자 왕이 다시 묻는다.
"만일 불도를 닦는 것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고통을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까?"
"괴로움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대해, 왕은 현재에 미래의 괴로움이 있느냐고 묻고 비구는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왕은 "스님, 현재에 있지도 않은 괴로움을 버리기 위해서 불도를 닦는 것은 너무 앞서서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묻는다. 그러나 비구는 왕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왕에게 다시 묻는다.
"대왕이시여, 어떤 적국의 왕이 원수나 대항자로서 군대를 몰고 침략해 올 때, 그들과 맞서서 싸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왕께서는 적군이 침략해 올 때에 이르러서야 참호를 파고 보루를 쌓고 성문을 달고 망탑을 세우고 군대의 식량을 준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미리 준비할 것입니다. 전차술, 궁술, 검술 따위도 미리 훈련시킬 것입니다. 이렇게 준비하는 것은 준비할 당시에 전쟁발발의 위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침략을 방어할 준비를 하듯이 지금 존재하지는 않지만 앞으로 닥쳐올 고통에 대비하기 위해서 불법을 닦는 것입니다."
나가세나 비구는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 전쟁을 준비하면 이미 늦기 때문에 미리 전쟁에 대비해서 준비하듯이 현재에 고통이 없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일어날 고통에 대해서 미리 준비하기 위하여 불법을 닦는다고 한다. 이 설명을 듣고 왕은 다시 다른 비유로 설명해 달라고 부탁한다. 비구가 말한다.
"우리는 목이 마를 때에 이르러서야 우물을 파고 저수지를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미리 우물을 팝니다. 또 배가 고플 때에 이르러서야 무엇인가 먹고 싶다고 생각하여 밭에 씨앗을 뿌리지 않습니다. 미리미리 곡식을 준비해 둡니다. 고통에 대해서 준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닥칠지 모를 어려움에 대해서 준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장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과 어려움은 예고를 하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그것들을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비구는 현실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막연하게 말하고 있다. 또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도 설명되지 않고 있다. 그 고통에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된다. 경제적인 손실, 실연, 배반, 이별, 죽음, 사업의 실패, 정치적인 패배 등 많은 종류의 고통이 있을 수 있다. 고통 극복의 방법은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안이한 방법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고통과 대치함으로써 고통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밀린다판하(15) 고통을 맞을 준비-2
요즈음은 황금만능주의 시대라고 해서 경제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니까 물질의 고통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자. 지금의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당장 먹을 것, 입을 것, 머무를 곳이 없어서 걱정하지는 않는다. 나름대로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다. 무허가 슬레이트 지붕밑의 사글세방에서 연탄가스 냄새를 맡으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불편할 수도 있다.
고통을 극복한다는 것은 불만족과 불편을 고통이 아닌 기쁨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소한 불편에도 고통을 느끼되 그 고통을 예의 주시하는 것이다. 고통의 시작과 끝을 보는 것이다. 현재는 물질로 인해서 고통을 느끼지 않지만 지금의 살림상태가 보다 더 악화될 수도 있다. 고통을 예의 주시하라는 것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게 되어서 물질이 아쉬울 때 물질적으로 저축을 해서 닥쳐올지도 모를 고통을 예방하라는 것이 아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갑자기 중병을 얻어서 그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셋돈을 빼내어 써야만 할 처지가 되었을 때, 그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결혼하기로 한 상대로부터 이쪽에서 돈이 없다는 이유로 결혼을 취소 당했을 때,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고통에의 대비는 고통으로부터의 도주가 아니다. 고통으로부터의 회피도 아니다. 고통을 정면으로 맞는 것이다. 고통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는 것이다. 고통을 철저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에 취하지 않고 빠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고통의 얼굴을 여실히 보아야 한다. 그것이 고통에 대한 대비이다.
사업을 하다보면 잘될 때도 있고 잘못될 때도 있다.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고통에 대비해서 미리 불도를 닦는 것은 사업이 항상 잘되도록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고 사업이 잘못되는 경우에 부딪혀 그때 사업의 실패를 인생의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사업의 실패로 인해서 행복하던 삶이 갑자기 불행한 삶으로 바뀌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사업을 실패하고 억지로 웃으면서 손을 털고 일어나라는 것 역시 아니다.
고통에의 대비는 고통을 느끼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조잡하고 어설프게 고통을 아는 척하지 말고 참으로 철저하게 고통의 밑바닥을 보라는 말이다. 단지 고통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고통을 철저히 느끼면서도 고통에 빠지지 않는 것이 고통에의 대비이다.
사랑을 받을 때도 있지만 사랑 대신에 고무로 된 인형만을 받을 수도 있다. 마음이 빠져버린 육체만을 앞에 놓고 있을 수도 있다. 또 사랑 대신에 이별을 받을 수도 있다. 이별의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나가세나 비구가 의미하는 고통에의 대비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다. 슬퍼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슬퍼하고 철저하게 고통을 맛보는 것이다. 단지 그 고통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고통에 취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을 여실히 보는 것이다.
건강하던 몸에 병이 들 수가 있다. 젊었던 몸이 늙게 된다. 숨쉬던 몸에서 숨이 끊어지고 육체를 땅에 묻어야 할 때가 올 수도 있다. 고통에 대한 준비는 이때에 고통을 느끼지 말고 행복감을 느끼라는 것이 아니다.
장자처럼 아내가 죽었을 때,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춤추라는 것도 아니다. 고통에 대한 준비는 고통에 대한 불감증이 아니라 뼈저리게 음미하는 것이다. 단지 그것에 취하지 않는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놀림 당하지 않는 것이다. 홀리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