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3. 대나무 그림자 뜰을 쓸고 있네
셋째 꼭지
대나무 그림자 뜰을 쓸고 있으나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달이 물 밑을 쓸고 지나가지만 수면에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네. - 야부 도천
맑고 화창한 어느 가을,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얻은 작은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방에서 일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기는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갔다. 항상 예매하는 습관을 가 지고 있던 나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표를 예매해 놓은 상태였다. 플렛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 안 피곤했던지 잠이 쏟아졌다. 기차에 타 서울 도착할 때까지 한 숨 푹 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열차가 도착했다. 기차안은 지정된 좌석을 찾으려 오고 가는 사람들과 앉았던 자리를 내어주는 사 람들로 혼잡했다. 좌석 승개과 입석 승객 간의 누치가 만만치 않았다. 사람들을 헤치고 표에 적힌 열차의 좌석을 찾아 갔는데 마침 그자리에 젊은 여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자리를 확인하고 "이자 리는 제 자리입니다." 하고 말하려 하는데 여자의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 왔다. 몹시 지치고 피곤 한 모습이 역력했다. 잠시 망설였다. 특실 좌석이니 아까운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 몸이 피곤하니 비켜달라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그래서 몇 번 더 '제 자리입니다.'하려다가 그만 두곤 하 였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몇 시간을 좌석의 팔걸이에 엉덩이를 걸치고 오게 되었다. 물 건을 잔뜩 싫은홍익회의 수레가 오갈때마다, 또 사람들이 통로를 이용하고 오갈때마다 불편하고 힘 들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리에 앉은 그 여자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해 바랑을 짊어지고 플렛폼을 빠져 나왔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복잡한 길을 걸어 나오다가 나는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아! 우리 모두는 모르는 가운데 누군가로부터 조건없이 받고 있구나! 우리가 미쳐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서로 주고 받고 살아가는가!'
나는 큰 깨침을 얻은 것처럼 기쁨과 환희가 솟았다. 이 세상 존제하는 모든 것이 한량없이 고맙다는 생각과 함께 온 세포가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내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누군가에게 조건없이 주고 나서야 나 또한 그동안 모르고 받아 왔을 그 많은 은혜들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비로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깨달음' 또한 멀리 있는 형이상학적인 관념이 아니다. 그리고 선사들 만이 통 하는 고고한 수화가 아니다. 깨달음이란 항상 일상 중에 있고, 인간 그 자체의 삶과 본질에 소용되 기 위해서 있다. 다만 깨달음을 이루는 것은 깨어있는 의식과 보이지 않는 이면을 잘 관통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갖고 세상을 바라볼 때만이 가능하다. 우리는 무엇이든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므로 깨달음 또한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말자. 대나무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달이 물 속을 깊숙 히 뚫어도 수면에는 파문 하나 일지 않는 다는 야부 스님의 게송. 어느 날 우연히 누구나 그 뜻을 헤아릴 때가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