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2. 연꽃처럼 청정한 사람
두번째 꼭지
진흙밭에 구른 사람들은 누구나 온 몸이 진흙으로 뒤덮히게 된다. 감정도 그와 같아 사람들은 누구나 슬픈 일을 당하면 슬픔으로 전율하고 기쁜 일을 경험하면 온 몸이 기쁨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몸에 묻은 진흙은 물로 씻어 낼 수는 있지만 마음에 한 번 들어온 온갖 감정들은 간단히 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씻는 일, 그것은 몸을 씻는 일과 달리 참 어려운 일이다. 한 번 마음에 불 붓듯 들어온 사랑, 미움,분노,욕망....간단히 씻어 버릴 수 있는 감정들이 아니다. 그러한 마음의 불꽃들이 온갖 행위로 표출되면 결 국은 업이 된다. 업은 사람을 우비고뇌(憂悲苦惱)로부터 끝없이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이유로 '단막오염(但莫汚染), 다만 오염되지 말아라'라고 설했다. 우리가 흔히 불성이라 부르는 부처의 종자. 씨앗은 본래 청정한 것인데 그 청정한 본성이 오염되면 씻어 내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
'깨달음을 얻으려거든, 해탈을 얻으려거든, 다만 오염되지 말아라.'
가만히 생각해 보자. 어떤 것이 오염되지 않는 것인가. 왜 오염되지 말라는 것인가. 왜 욕망을 제어하고 분별을 없애야 한다는 말인가. 분별의 세계에 살면서 어떻게 욕망에 물들지 않을 것인가. 분별의 세계에 살면서 어떻게 분별을 내지 않을 것이가. '이뭣고'가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큰 의심. 즉 화두가 되어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천진불이 한 사람있다. 천진불이란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함을 가진 부처님을 말한다. 사람이 세상 속에서 살면서 순수함을 유지하기는 매우 힘든 일인데 이 스님은 언제나 그 순수함 속에서 살아가는 천진불이다. 스님의 법명이 혜련인지, 혜정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그냥 혜련이라 부르니 다른 사람들도 혜련 스님이라 부른다. 오래전 만기사에 살 때 알게 되었고 그 후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는 스님이다. 혜련 스님을 처음 보았을 때 제멋대로 걸친 회색 승복을 빼고는 전혀 스님의 행색이 아니었다. 머리와 수염이 덥 스룩 하게 자라 있고 얼굴과 손발이 누릉지처럼 검게 터 있었다. 옷에서는 구정물이 줄줄 흘렀다. 한 쪽 뒤가 떨 어진 짝짝이 검정 고무신과 철이 시작될 때 입은 옷 한벌로 한 철이고 두 철이고 사는 스님이다. 그런 모습에 처 음엔 나도 사문의 위상에 손상을 주지 않을 까 염려되기도 했던 터러 조금 더 지켜보다가 한 마디쯤 해줘야겠다 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같이 살면서 찬찬히 살펴보니 혜련 스님에게는 행색으로 판단할 수 잇는 무엇인가 특별 한 것이 있다. 한 번은 혜련 스님의 옷이 하도 더러워 옷 한벌을 해준 적이 있었다. 스님은 받아둔 옷을 방 한 구 석에 놓아 두고 입고 있던 승복 한 벌과 짝짝이 고무신으로 한 철을 나는 것이었다. 왜 갈아입지 않느냐고 물으 니 "아직 옷을 갈아 입을 때가 아니잖아요"하고는 환하게 웃는다. 계절이 바뀌자 그간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새 옷 으로 갈아 입었다. 참 이상한 것은 그간 입었던 옷을 태워 버리는 것이었다. 여러번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스님은 전혀 새 것과 헌 것을 가리지 않았고 지나간 것을 아쉬어하거나 올 것 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한 번은 법회가 끝나고 신도들과 공양을 하는 시간이었다. 신도들이 혜련 스님의 머리에서 눈처럼 떨어지는 비 듬 때문에 같이 공양을 못하겠노라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스님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쳐다보며 공양을 하는 것이었다. 이쯤되니 신도들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기가 막힌 표정들만 짓고 있었다. 한 번은 내가 공양주 보살께 반찬이 짜고 맵다고 투정을 했다. 혜련스님은 그 반찬을 한 젓가락에 집어 입에 넣 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스님, 이 반찬 하나도 안 짠데요. 스님 하나도 안 매워요." 혜련 스님이 이렇게 나오면 더 이상 반찬 투정을 할 수가 없어진다. 혜련스님은 어떤 것도 타박하거나 헐뜯는 법 이 없다.스님은 결코 깨끗함과 더러움, 아름다움과 추함,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에 분별을 내지 않는 사람이다. 그 스님은 방에 들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다. 그렇다고 스님의 입에서 한 번도 심심하다거나 무료 하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스님이 하루종일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공양시간 이 되어서야 스님의 얼굴을 마주 할 수 있다. 스님은 흘리는 말이라도 함부로 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어떤 것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혜련 스님이 유독 관심을 보이는 것이 있다. 책을 봐도 순전히 바둑 책만 보는데 한 번 본 책은 바로 태워버린다. 외진 절에서 오산까지는 매일 걸어서 기원에 출근을 한다, 먼 길을 걸어다니는 스님이 안타까워 운전을 배워서 절에 잇는 차를 타고 다니라고 말하면 두 발로는 좁은 길도 다 다닐 수 있는데 왜 차를 타고 다니냐고 한다. "그런데 스님 기원에서는 뭐하셨어요?" "노인네들하고 짜장면 내기 바둑을 뒀어요." "스님이 이겼어요?" "오늘도 내가 졌어요." ".................." 스님은 바둑을 잘 두지만 이기고 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결코 싫고 좋은 일도 만들지 않을 뿐더러 어떤 일에 도 좋고 싫다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루는 기원에 간 스님이 밤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이 지나서야 돌아온 스님은 빈 쌀푸대를 들고 공양간 에 들어가더니 뭔가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내가 스님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니 스님!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요?" "아 예. 어제 기원에서 어떤 남자와 바둑을 두다가 그 사람 집에 가서 또 뒀어요. 그 사람이 자기 집에가서 더 두 자고 붙잡잖아요." "그런데 지금 뭐하세요?" "그 집에 갔더니 단칸방에 부인과 애들이 자고 있더라구요. 아침까지 바둑을 두었는데 그 부인이 일어나 밥을 차 려 주길래 아침밥도 얻어 먹고 왔어요." 스님은 자루에다 부지런히 과일을 담으며 말을 받았다. 피곤한 기색도 없이 과일을 어깨에 짊어지고 나가는 혜련 스님의 모습은 그대로 천진동자였다. 스님은 돈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내가 우리 절집의 식구들을 모아 놓고 보시금을 나눠 줄 때 스님은 항상 받은 보시금에서 반을 도로 꺼내 놓는다. "절 살림도 어렵고 쓰일 데도 많을 텐데 저는 돈이 필요 없어요." 그런데 항상 절반을 꺼내 놓던 스님이 언제부터인가 보시금을 그대로 받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작은 바랑을 메고 방에서 나오며 인도에 다녀 오겠다며 길을 나섰다. 스님은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혜련 스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항상 스님의 웃는 얼굴을 기억한다, 어떤 일에도 성내지 않는 모습을 기억하고 어느 것도 분별하지 않는 모습을 기억한다. 짝짝이 검정고무신과 해진 한 벌 옷을 기억하고 어느 것도 분별하지 않고 어느 것에도 걸림이 없던 스님의 참 자유로움을 기억한다. 스님을 보면 천진불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깨달음이 왜 오염되지 않는 본성에 있다고 했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혜련 스님은 욕망과 분별의 진흙 밭에 살면서도 그것에 물들지 않고 진실로 청정하게 피어난 연꽃 같은 사람이다. 우리는 혜련 스님처럼 살지 못한다. 그러나 스님의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에게 깊이 생각할 만한 화두를 던져준 다. 오염되지 않는다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 뭣고'. 그것이 이 진흙밭과 같은 욕망이 충천한 속에 살면서도 자신 을 잃어버리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는 방법이다. 차갑고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 도량석 하는 혜련스님의 은은한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떠올리곤 한다.
참선도 그만두고 책마저 안 읽으니 천진스런 본래대로 살아갈 뿐이네 신령스러운 마음. 저 시비 밖의 일이라. 억억한 이 도인을 그 누가 알리 ------------철주 덕제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