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7.엘렌의 깨달음
일곱번째 이야기
홀연히 눈썹을 세우고 눈동자 한 번 크게 하여 문득 본래의 면목을 보아라. 그 본래의 면목이 어떠하더냐.
선사들은 젊은 수좌가 멀리서 도를 물으러 오면 어디서 왔냐고 묻곤 한다. 그러면 수좌는 자신의 고향을 말한다. '예! 멀리 광주 땅에서 도를 얻으러 왔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선사가 물은 것은 중의적이고 고차원적인 물음이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그 본래의 면목은 무엇인가? 하고 물은 것이다. 본래면목. 무차별적인 본래의 자기. 도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가장 먼저이 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존재가 어디로부터 홀연히 와서 어디로 홀연히 가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것은 우리 존재 자체의 신령스러움과 영속성을 믿는 까닭이다. 스님들만이 유독 이러한 형이상학적이고 고차원적인 의문을 내고 평생 마음 닦는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러한 의문은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이 본래부터 가져야 할 의문이어야 마땅하다. 자기의 태어난 뿌리와 근본이 어딘지 궁금하듯 자 기의 본래 면목에 대한 궁금증은 경험 이전의 본능, 즉 선험적인 것이리라. 근래 서양사람들이 특히 참선이라는 것에 매혹되어 있다고 한다. 선은 잡다한 생각과 상념없는 존재 그 자체를 들여다 보기 위한 맑은 창과 같은 것이기에 서양사람들은 그것을 큰 매혹으로 생각하고 있다. 직 장과 집에서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는 시간을 갖고 심지어 유치원 아이들에게도 정기적으로 명상을 지 도하고 있다. 얼마 전 우리 절에 독일에서 온 손님이 일주일 동안 머무른 적이 있었다. 이름이 엘렌이라고 하는 여잔데 그녀는 유치원교사를 하는 평범한 주부다. 그녀는 또 하루도 빠짐없이 명상을 즐기는 요기(요가를 즐기 는 사람)였다. 지켜보니 절에 머무르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법당에 가서 참선을 하고 순전한 채식으로 하루 한 끼의 아침 식사만 하였다. 아침을 먹고 나서는 전혀 꾸밈없는 모습으로 낡은 옷 그대로 작은 돗 자리 하나 들고 법당 뒤 야트막한 산으로 오른다. 그녀는 거기서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 어스름에 내 려오곤 하는 것이다. 산이라고 해야 얕으막한 뒷산일 뿐이다. 거기서 그녀는 풀을 밟고 공기를 마시고 바람을 즐기고 해를 쬐 고 풀벌레들과 지내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왔다.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지나가는 웃음에서 매우 만족스럽 고 평온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가 일주일간 머물고 휴가가 끝나 돌아가는 날이 되었다.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잇어 여러 사람이 들 러 앉았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작별과 안녕은 빌어 주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산에서 종일 어떻게 보냈습니까?" "바람 소리도 듣고 꽃 향기도 맡고 흙도 만져 보고 지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고 뭘 느꼈습니까?" "생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생명은 때가 되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았지요. 결국 다들 죽게 마련인데 사람들만 유독 욕심을 내고 허영에 싸여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거룩합니다." "스님! 좋은 말씀 한마디 해주시면 마음에 새게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지체없이 벽력 같이 대답해 주었다.
"우리 모두는 다 죽는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그리고 일어나 큰 절을 하고 대답 하였다. "스님 알겠습니다." "............"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어떤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먼 이국에서 온 여자, 얼굴 생김새와 언어 그리고 사고의 틀이 우리와는 다르지만 한 여자에게서 전혀 이 질적이지 않은 심오함과 경건함, 진지함이 묻어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벽에 창을 만들어 놓으면 밖이 훤하게 보이고 또 공기가 드나들어 숨이 확 트인다. 창을 잘 닦아 맑게 해 놓으면 그곳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도 맑게 보인다. 창이 이렇듯 집의 숨구멍과 같다면 참선은 존재의 창 과 같다. 일상생활에서 잠시 동안이라도 정(定)에 들어 선을 참구하는 것은 존재에 숨구멍을 틔우는 것과 같고 마 음의 창을 잘 닦아 세상을 맑게 보고자 하는 것과 같다. 금같이 빛나는 가르침을 듣고 또 그것을 아무리 잘 이해한다 해도 한 번 실천에 옮기는 것만 못하다고 하 였다. 하루 삼십 분만이라도 고요히 앉아 외부의 것에 매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 본다면 그것이 곧 자신의 본래면목을 보려는 큰 의심의 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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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벌거벗은 주지스님'의 마지막입니다. 한달 넘짓 37편의 주지스님의 법문과도 같은 소중한 글들이 나의 미련한 손끝에 의해 인터넷 상에 한 자리를
메웠습니다. 매일 사경하 듯 옮기리라 다짐하고 해 온 일들에서 많은 오자가 나온 걸 보고 옮기겠다는 형식에 매여 초심은 어디로 갔는지...부끄러움 또한 적지
않습니다. 주지스님의 이 글들이 책으로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심으로 수고로왔을 터, 이 책을 더 많은 이들과 함께 공유하고픈 욕심이 한낮 무지한 저에
의해 스님의 글들의 원 뜻에 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 스스로 무덤을 판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다시 한 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판을 하나 하나 힘주어 두드릴 땐 가슴에 꼭꼭 세겨 보고픈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한 편 한 편 글들이 옮겨질 때 참으로 이상한 우연들을 체험했습니다. 상황과
제 관심사가 자주 맞아 떨어지는 그런 체험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관해 우리 모두 다 멍했던 순간 우연히 죽음에 관한 글들이 몇일 옮겨지고 있
었고 제가 제 자신의 살아온 날들에 대해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아줌마와 보살'이 옮기는 때 이어서 그 글에서 저는 해답을 찾았고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엘렌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다음 날이면 저는 딸아이가 있는 영국으로 갑니다. 조계사에 가서 탬플스테이에 관한 자료를 얻어 왔는데 그 곳에 가면
딸아이의 친구들, 또 다른 엘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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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깨어 있으므로 세상사에 끄들려 다니지 말고 항상 내 마음을 단속해야 한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거리에서 흔히 보는 두더지 게임처럼 못 나오게 두드려도 다시 튀어나오는 , 그것이 우리가 단속해야 하는 이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님! 훌륭하신 책과 벗이 되었고 제겐 경전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수향 삼배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