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께서 남긴 선물꾸러미를 열어 봅니다. 겸손과 용기와 헌신으로 이뤄진 거울입니다. 그 거울에 우리네 삶을 비춰봅니다. 이제 역사의 사표로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의를 이루라는 숙제를 남기셨습니다. 이 시대 성직자와 지성인이 가야할 길이 거기 있습니다.
어른이 귀한 시대에 참으로 이 땅의 어른으로 사셨던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선종하셨습니다. 선종 2~3일 전부터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지요. 그리고 마지막 이 세상과의 작별 인사로 “고맙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합니다.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저는 이 시대의 ‘대선지식’이 떠났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고맙다, 이 한 마디에서 저는 ‘삶과 죽음’의 인연 거래로 거둘 수 있는 절정의 아름다움을 봤습니다. 생사의 본질이 거기에 있었고, 겸손과 용기와 헌신으로 일관한 당신의 온 삶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한 시대의 ‘보살’로 살다간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군더더기 없는 열반송이었습니다. 그 단순한 한 마디 속에 성직자가 가야 할 길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모두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애도하고 지난 삶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김 추기경께서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을 가벼이 여기는 이들도 그 대열에 섞여 있습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진심이겠지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김 추기경께서 우리 모두에게 남긴 또 다른 선물이 될 것입니다.
선물 꾸러미를 조심스럽게 열어 봅니다. 겸손과 용기와 헌신으로 이루어진 거울입니다. 그 거울에 지금 우리네 삶을 비춰 봅니다. 서글픕니다. 권력자와 지식인과 성직자들, 소위 사회를 이끌어간다는 이들에게서 겸손을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다른 이들은 두고라도 성직자들 가운데도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김 추기경의 말씀을 행동으로 보여 주는 이는 드뭅니다. 교회를 사찰로 바꾸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약자의 편에 서기는커녕 군림하려 하고 대접 받으려 합니다. 오히려 권력의 편에 서서 이권을 탐하는 데 급급합니다. 이들에게 용기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과 민주주의가 유린당하는 걸 보고도 못 본 척하는 두둑한 배짱일 뿐입니다. 이들에게 헌신이란 진리와 정의와 세상을 위한 헌신이 아니라 신도들에게 믿음을 구걸하는 헌신입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한 시대의 사표였습니다. 국민의 자유와 인권과 민주주의가 신음하던 시절, ‘정의의 사도’로서 성직자와 지성인이 가야 할 길을 행동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런 김 추기경께서 이제는 역사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김 추기경의 행동을 요구했던 시대는 갔습니다. 김 추기경께서는 지금 역사의 사표로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의를 구현하라는 숙제를 남기셨습니다.
참으로 무거운 숙제입니다. 현재의 시국 상황은 김 추기경께서 사셨던 군부 독재 시절보다 더 어려운 상황입니다. 당시는 사회적 모순과 실종된 인권과 민주주의의 행방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 가야 할 길도 선명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권력화된 자본과 자본화된 권력이 한 몸을 이루어 오로지 ‘돈’으로써 당근을 던지고 채찍을 휘두르면서 강고한 위계를 강요합니다. 인간의 존엄과 민주적 가치는 ‘돈’에 종속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의 근본적인 모순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성직자와 지성인들이 가야 할 길이 거기에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당신이 행동으로써 보이신 겸손과 용기와 헌신을 거울삼아 우리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고맙습니다. 편히 잠드십시오.
사부대중 여러분!
저는 오늘 불문에 귀의한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자괴감과 비통함을 느낍니다. 세상이 이 지경인데 종교는 왜 있어야 하는지, 과연 누구를 위한 종교인지, 수행의 의미는 무엇인지, 성직자가 왜 필요한지, 그 존재 의미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담하고 부끄럽습니다. 종교라도 제 구실을 했다면 세상이 이지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특히 제가 몸담고 있는 불교계는 입만 열면 중생구제와 정토구현을 말합니다. 과연 생존의 벼랑에서 신음하는 이웃을 두고 어디에 있는 중생을 구제할 것이며, 지금 이땅을 떠나 어디에서 정토를 구현할 것입니까.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다 했습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있는 부처가 죽어가고 있는데 어떤 불조의 혜명을 이어가겠다는 것임니까?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대승보살의 정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을 법당으로, 온 생명을 부처로 섬기겠다는 발심을 새로이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불교는 희망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밝혀 보이신 진리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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