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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사에 대해-포교론

호법 그리고 포교

by 자수향 2009. 3. 17. 00:08

본문

 포교론

Ⅰ. 序說

1. 직접적인 布敎
2. 간접적인 布敎

Ⅱ. 布敎의 意義

Ⅲ. 布敎의 目的

Ⅳ. 布敎의 實際

1. 평상시의 준비
2. 대상에 관한 분석
3. 布敎師의 능력
4. 布敎師의 자세
5. 布敎의 형태

Ⅴ. 布敎의 功德

Ⅰ. 序 說
현대사회는 모든 것을 과학적인 사고방식 위에서 실증적으로 근거를 제시해야만 인정받는 과학만능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의적이거나 신념의 총화로 여겨지는 종교는 어쩌면 비과학적이므로,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서 그에 관한 신뢰가 점점 더 줄어들어서 마침내는 쇠멸할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받아 들여졌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과는 달리 인간의 정신을 주로 다루는 동양종교 특히 불교는, 오히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서 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는 풍부해지고 여유가 있었지만, 인간소외를 가져오고 정신적인 갈등 등을 초래함에, 자연 이성을 신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귀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종교인 불교는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중생들로 하여금 인류공통의 염원 즉, 현재의 불행이나 불안에서 벗어나 안심입명(安心立命)케 하고 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포교(布敎)이다. 이는 교의(敎義)를 홍포(弘布)한다는 의미로 종교의 생명이기도 하다. 본래 "포교"의 포(布)란 베〔옷감〕로서, 옛날에 화폐의 대용으로 사용되었던 통화(通貨)인데, 이것이 널리 유통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과 같이, 부처님의 말씀인 법보(法寶)가 이렇게 유통되어서 중생들의 마음을 윤택하게 하므로 이와같이 불렀다.

1. 직접적인 布敎
부처님께서는 포교의 중요성에 대해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비구들아,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안락을 위해서 유행(遊行)하라. 둘이서 한 길을 가지 말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니, 뜻과 글이 다 갖추어진 진리를 널리 전하라. 모두 윈만하고 청정한 행을 가르쳐 주어라. 세상에는 더러움이 적은 사람도 있는데, 진리를 듣지 못하면 소멸할 것이다"고 했고, 또 "내가 멸한뒤에 여러 제자들에게 서로 전하여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법을 전하면, 여래의 법신은 항상 멸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경계하는 가르침으로서는 "그러나 불자야, 법을 먹는 아귀가 되어서는 안된다. 남을 도울줄 모르고, 법에 의하여 먹고 살려는 자는 법을 먹는 아귀이다. 또한 너희가 전하는 법을 듣고 사람들이 기뻐할 때에 그것을 자기의 공덕처럼 생각하면 이는 벌써 법을 먹는 아귀이다."라고 해서 후세에 진리의 말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공덕이며, 또한 경계해야 할 덕목인가를 설하고 있다.

포교란 인격적인 접촉이며 생명의 가응동교(感應同校)이다. 종교만 있고 포교가 없다면 죽은 종교가 되어서 더 이상의 발전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불교계에서도 3대사업으로서 역경(譯經)과 포교와 도제양성(徒弟養成)을 꼽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느 것 하나도 만족치 못한 형편이다.

이 중에서 포교에는 크게 직접적인 방법과 간접적인 방법이 있는데, 직접적인 포교로는 직접으로 언설 등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거승로서, 여기에는 설법(說法)과 법화(法話)와 강의(講義) 등이 있다. 이러한 형태를 또한 설법교화(說法敎化)라고도 한다. 그래서 운문(韻文)과 산문(散文) 및 설화(說話) 등의 형식도 이 가운데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운문에도 산문으로 된 경전의 내용을 다시 요약하며 게송(偈頌)으로 읊은 중송(重頌) 또은 응송(應頌)인 geyya가 있고 산설(散說)과는 상관없이 게송만을 독립적으로 읊은 고기송(孤起頌) 또는 풍송(諷頌)인 g th 가 있다.

이외에도 상대방의 이해를 쉽고 바르게 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비유(譬喩)가 있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적인 반성과 과거의 회상 및 미래에 있어서의 선과(善果)를 거두도록 하려는 인연담(因緣談)이 있으며, 문답을 통해서 불법의 진수를 전하는 방법 등이 있는데, 이러한 모든 방법 등은 특별히 어느 것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운문이나 문답법과 같은 것은 상당한 지식을 요하는 것이익 때문에 사전에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잇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어떤 형식을 취하든지간에 상대방의 근기(根機)에 맞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하여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상대방의 요구에 맞는 내용을 설해 주는 응병여약(應病與藥)식의 법을 전할 때에 가장 효과가 큰 것만은 사실이다.

2. 간접적인 布敎
간접적인 포교방법이라고 하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상대방에게 감화를 준다든지, 중생 스스로 불법을 찾게 하는 방법을 통틀어서 말한다. 이와 같은 예는 부처님과 같은 인격 완성자에게 나타나는 위의교화(威儀敎化)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며, 무정설법(無情說法)도 한 형태라고 보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각 사찰이나 불교단체에서 포교를 목적으로 운영하는 사업이나 후 생복지, 문서포교, 동화보급, 자료의 공개 등이 이에 속한다. 또한 우리나라와 같이 불교가 대중과 한 때나마 밀착된 적이 있었고, 산수 좋은 곳에서 사찰이 많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을 이용해서 대중들을 사찰로 끄는 방법도 생각해 볼 일이다.

현대 사람들에게는 규칙적인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려는 회귀본능을 얼마만큼은 다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럴 때에 그러한 살마들에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은 더할나위 없는 안식처이다. 다소간에 교통이 문제가 되더라도 한번 다녀와서 심신의 피로를 덜게만 된다면 자연 사찰과의 관계는 무관심치 않을 것이다. 또한 이들에게 간단한 문서전달이나 친절한 사찰안내 등을 조금은 전문적으로 시도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옛적과 달리 불교도 신도를 스스로 관리하고 조직해야 한다. 상당한 인력과 경제력이 필요하겠지만 앞으로는 자급자족할 수밖에 있다. 그래서 있는 자원은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없는 자원은 보충해서 포교에 만전을 기하여야 한다. 요즘과 같이 공해가 심할 때에 사찰인근에서 나오는 약수터를 잘 손질해서 오는 사람들에게 항시 베풀어준다면 포교의 효율성은 자연 높아질 것이다.

Ⅱ. 布敎의 意義
의식주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해 주는 기본이라면, 포교는 종교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왜 포교를 하느냐 하는 질문 보다도, 만약 포교를 안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더 현실감을 주는 내용인 것 같다. 다종교시대에 살면서 자기에게 확신을 가지고 이를 남에게 전달하는 것은, 비단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된다. 대체로 불교를 자기의 종교로 가지고 있는 불자들은 이와 같은 확신이 부족하다. 이는 지혜를 중요시하는 불교의 근본이념에도 그 까닭이 있겠지만, 너무나 방대하고 상당한 지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 같다.

아무튼 현대와 같이 여러 종교가 치열하게 자기 영역을 확대해 가는 시대에, 불교도 이에 알맞는 교의를 개발해서 포교하지 않으면 또다른 시련을 맞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안목에서 불교를 전달하는 의의를 간추린다면 가장 기본적인 출발이 자각(自覺)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자각은 일종의 구원(救援)과도 상통하는데, 이를 기본으로 하여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출발이 어렵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면,

첫째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포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는 한 시대만을 풍미하지만, 종교는 만년을 간다고 한다. 진리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다 그러하겠지만, 어느 한 시대, 한 민족만을 상대해서는 종교라고 볼 수 없다. 언제, 어느 때에 들어도 올바른 것이 진리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불교는 능히 세계적이고 초민족적이고 초이념적인 것, 즉 진리이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지키고 전파한다는 의미에서도 널리 포교해야 하고, 지혜의 전달자의 입장에 서서 포교해야 한다.

둘째로 온전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포교해야 한다. 온 인류가 잘 살아가는 데는 양심껏 일하고 능력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풍토가 되어야만, 좋은 사회, 희망이 있는 사회도 될 수 있다. 부정이 정의를 억누른다든지, 정의가 항상 숨어 있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안정된 사회라고는 볼 수 없다. 불교는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이를 수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침해를 당하면 이는 진리의 침해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이념을 염두에 두고 종교활동을 하지 않으면, 이는 법을 먹고 사는 아귀에 불과하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떻게 말하면 자기자신의 인격을 위해서라도 부처님의 법을 펴 나가야 한다. 당리당략(黨利黨略)을 위한 포교는 생명력이 없다. 진리에 수순하는 좋은 사회를 이루려는 꿈을 갖고 불교인은 끝없이 도전하고 지켜야 한다. 자기혁신이 요구된다.

셋째로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도 포교를 해야 한다. 한 종교가 걸어온 수 천년이라는 세월은 희비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만큼 보존의 가치가 있다. 다소간에 쇠퇴한다고 해서 우려할 것이 아니고, 흥기한다고 해서 마음 놓을 것도 아니다.

역시 진리이기 때문에 흥망성쇠가 있을 수 없지만 때로 좌절감이 드는 것은 마음에 확신, 즉 자각이 없어서 일 것이다. 새로운 것이 좋기는 하지만 맹목적으로 이를 받아 들여서는 안된다. 반드시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탐구심으로 이것을 개발해야 한다. 불교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종교이다. 불교인으로서 또한 한국인으로서 불교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된다. 우리 것을 지키고 찾아야 한다. 요즘은 이러한 관점에 상당한 호응이 있다. 이럴때일수록 이를 불교인이 앞장서서 선도해야 한다. 주어진 사명이자 종교인의 신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불교의 포교는 자기혁신, 즉 자각 위에서 이루어져야만 생명력도 있고 오래 갈 수 있으며, 긍지를 가지고 이를 몸소 실천할 때에 진리가 그러한 것처런 부담감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포교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Ⅲ. 布敎의 目的
포교의 목적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실한 가르침을 널리 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고 생활하게 하며, 모든 사회를 평화롭게 만들어서 현실을 극락정토로 만드는 것이 그 궁극적인 목표임을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설법자의 능력과 대중들의 근기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니, 이는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아무튼 지적으로는 부처님의 법을 알게 하여야 하며, 감정적으로는 느끼고, 의지적으로는 이를 실천케 해야 하는데, 이러한 뜻을 대개 목표로 정하면 다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롤 이해시키는 것이다. 확신이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대화는 그 전달에 가식이 없기 때문에 쉽게 상대방에게 이해된다. 그러려면 많은 지식과 체험이 필요하며, 그 바탕이 되는 확신도 굳세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주입식이 아니고 자유로워야 하며, 주관적인 내용 보다는 객관적인 평범한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불교 이념이 다른 종교 보다도 쉽게 긍정이 가는 것은 그 교리 자체가 이지적이고 논리적이기 때문이므로, 이 점을 잘 인식해서 전달하면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로 감동을 주는 일이다. 어차피 포교가 상대방과 나와의 감응동교(感應同交)라면, 이에 철저하게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 즉시에 이루어져야지 뒤를 기약하는 것은 의미전달에 있어서 그렇게 쉽지가 않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삼과항현재(三科恒現在)라는 말을 명심해서 빈 틈이 없어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현재만을 고집해서 무리를 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거두므로 그 때의 상황판단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지를 발휘해야 한다.

셋째로 생활 속에서 실천케 해야 한다. 아는 것〔解〕만큼 실천하는 것〔行〕이 중요하다〔解行合一〕. 대개의 종교인들은 그 교의를 몰라서 실천치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의지가 약해서 수행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참으로 진정한 종교인은 아는 것만큼 실천해야 한다. 일반인로서 오계 내지 십계만 철저히 해도 훌륭한 삶을 가질 수가 있다. 계율이라는 것은 지켜서 악을 끊는데〔止惡〕도 일차적인 목적이 있지만, 잘 지키면 저절로 선해지는 것〔至善 : 作善〕이 그 궁극적인 목적이다. 특히 종교인이라면 아는 것 보다는 실천하는 수행이 더 강조될 때가 있지만, 이것도 역시 파행적인 지침이다. 아는 것만 많고 실천치 않으면 머리만 무겁고, 실천만 있고 아는 것이 없으면 맹목(신)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적절한 자기 나름대로의 수행방법을 찾아서 꾸준히 해행(解行)을 겸해서 실천하면 생활에 활력을 줄 수 있게 된다.

이상으로 그 목적을 들었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한 때만의 일이 아니고, 전 생애를 바쳐서 한다는 장기적이고도 의지적인 각오가 필요하며, 대비천제(大悲闡提)와 같은 보살심이 원동력이 되어서 보은행으로 실천될 때에 뜻한 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Ⅳ. 布敎의 實際
1. 평상시의 준비
훌륭한 의사전달은 포교 그 자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평상시에 얼마만한 자료를 준비해서 소화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면에서 그 포교실제의 반은 이미 결정된 상태라고 봄이 타당하다. 어떤 사람이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서 준비를 단단히 했다면, 그 사람은 어떤 경우가 닥치더라도 큰 어려움 없이 처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는 당황하게 되고 소신없는 설만을 늘어 놓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불교인으로서 의사전달에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평상시에 조금씩이라도 준비하는 자세가 가장 필요하다. 그래서 항상 메모지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 메모지에는,

① 모든 서적ㆍ신문ㆍ잡지 등을 읽고서 새롭게 발견된 내용이나 관심을 가졌던 분야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빠짐없이 모으거나 적어 두어야 하고,

②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것들을 필요에 따라서 기록해 놓고,

③ 유명한 사람의 강연이나 설법은 물론이고, 다소 못하는 사람들의 문제점도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파악해서 기록해 놓아야 하며,

④ 실제로 날짜 등이 정해졌으면, 사전에 충분히 그 위치, 장소, 주위환경, 제목, 대상
등에 대해서 면밀한 검토를 하여, 거기에 알맞는 내용을 간락하게 메모해 두는 것이 요구된다.

2. 대상에 관한 분석
불교에 관해서 평소에 많은 지식을 쌓았다 해도,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든지 의사로서 전달할 때는 최대의 효과를 기대해야 하므로, 그 대상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없이는 가능치 않다. 그래서 흔히 그 대상이 유아들인지 아동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인지를 사전에 알아야 하며, 더 나아가서 성별과 직업, 환경 등을 검토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와 나 사이에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하면, 최대의 의사전달이 되어서 구태여 말이나 행동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開口卽錯〕, 그렇게 되는 경우는 사실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언어나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말이 소리나 공해로 되지 않기 위해서도 사전에 충분한 대상에 관한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말 잘하는 달변(達辯)보다는 눌변(訥辯)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지만, 이러한 경우는 특수한 예외인 것과 같이, 상대에 대한 충분한 관찰은 능히 대상을 이길 수밖에 없는 것〔知彼知己 百戰百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평상시대로 누구에게나 하는 것, 즉 상대에 따라서 편견을 갖지 말고 담담하게 망설이지 않고 한다면, 크게 우려치 않아도 될 것이다. 상대를 의식치 않는 담력이 필요하다.

2. 布敎師의 능력
부처님은 일체지자이기 때문에 중생과는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남다르게 십력(十力)과 사무소외(四無所畏) 등을 갖추고 계시므로 막힘이 없이 진리를 토로한다고 하는데, 특히 삼념주라고 해서,

① 대중들이 공경심을 가지고 잘 들어도 부처님은 설법하실 때에 평등심에 머물고〔於不恭敬聽聞者 住平等心〕,

② 대중들이 공경심을 갖지 않고 들어도 부처님은 설법하실 때에 평등심에 머물며〔於不恭敬聽聞者 住平等心〕,

③ 대중들이 공경심을 가지고 듣거나 공경심을 갖지 않고 듣거나간에 부처님은 이에 관여치 않고 평등심에 머물러서〔於恭敬聽聞與不恭敬聽聞者 住平等心〕법을 설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사무애변〔四無碍辯〕의 힘을 가지셨다고 하며, 팔지(八智)를 갖추고서 설법하셨다고도 하지만, 중생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설법자는 적어도 어느 정도의 능력이 요구되고 있느니 소위 사법(四法)이라는 것으로서,

① 두루 알고 많이 배워서 일체의 언사와 장구(章句)를 능지하여야 하며〔廣博多學能持一切言辭章句〕,

② 결정코 세간과 출세간의 제법의 생멸상을 잘 알아야 하며〔決定善知世間出世間諸法生滅相〕,
③ 선정과 지혜를 증득해서, 모든 경전에서 설하는 법에 수순하여 의심이 없어야 하며 〔得禪定智慧於諸經法隨順無〕,

④ 더하지도 말고 덜하지도 말고 말한 바와 같이 실천해야 한다〔不增不損如所說行〕는 것이다.

그리고 양고승전에 보면 특별히 설법자는, 대중을 사로잡을 만한 소리〔音聲〕를 지니고서, 말의 내용을 때와 장소에 적합하게 설하고〔辯才〕, 임기응변에 능한 재치〔才致〕가 있으면서도, 박학다식해서 막힘이 없어야 한다〔博學〕고 소개하고 있다.

아무튼 설법자의 인격에 따라서 설법 내용이 천차만별하다는 것으로서, "바른 사람이 삿된 법을 설하더라도 삿된 법은 정법이 되나, 삿된 사람이 정법을 설하면 정법일지라도 삿된 법이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자이면서 인격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막상 설법시에는, "코끼리의 왕처럼 결단력 있고 믿음직스러우며, 사자처럼 용맹스럽고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산처럼 움직이지 않고, 바다처럼 지혜로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궁극적으로 불교의 포교가 한없이 많은 중생들을 상대로 하여, 그들을 고통의 늪에서 열락의 숲으로 인도하고, 미망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포교자 자신이 번뇌를 끊고 법문을 배워서 원만한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도 불도를 성취하고 아울러서 중생들도 함께 성불케 하는 것이 현실적인 요구이니 만큼, 이는 대중의 도덕심을 향상시키고 사상을 선도해서 사회를 개선한다는 도덕교육의 일반성도 포함하고 있으므로, 불교포교는 근본적으로 사회혁신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포교사에게는 다음과 같은 의무가 주어진다. 즉,
① 온갖 재난과 고통을 덜어주어야 하며,
② 대중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어야 하며,
③ 대중들의 서원을 청취해서 잘 분별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설법자의 내면적인 조건으로서,
① 자신감을 가지고, ② 열성을 다 해서, ③ 친절하고 겸손하게, ④ 경험한 바를, ⑤ 재치있게 발표하는 것이 요청되고, 외면적인 조건으로서는, ① 건강한 몸으로, ② 품위있게, ③ 적당한 목소리로, ④ 표준말 등을 사용하는 것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4. 布敎師의 자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포교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전하는 것은 임무이자 당연한 불자의 도리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러한 사람을 칭찬하여 말씀하기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내가 멸도한 후에 정중히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법화경중의 한 구절을 설한다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곧 여래의 사자(使者)이며, 여래가 보낸 사람으로서 여래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 하물며 사람들을 위해서 대중에게 널리 설하는 사람이야말로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하면서, 포교할 것을 적극 권장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포교사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격자이어야 하기 때문에 보살은 스스로 먼저 보시하고 지계해서 만족한 근행으로 정진한 후에 다른 사람을 교화한다고 지적한 것이 그것이다.

아무튼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관건인데 그러려면 여러 가지로 세세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법사는 항상 그 앉은 자리를 여래의 사자좌와 같이 생각하여, 의당 인묵(忍默)해서 진심(瞋心)을 내지 않아야하고 자민(慈愍)ㆍ애어(愛語)ㆍ겸하(謙下)로 중생심을 호지해야 한다." 는것이며, 될 수 있는데로 타인의 허물을 말하지 말고, 다른 법사를 업신여기지 말며, 원망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어렵게 묻는 바가 있어도 솔직함과 재치로 잘 해설해서 일체종지를 얻게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법사는,
① 어떠한 경우에서도 항상 세계의 인민들을 상대로 말하듯이 해야 하고,
② 항상 청중들의 어떠한 궁금증이라도 속시원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③ 언제, 어떠한 포교를 하더라도, 자기가 한 말이 그대로 문자화되어도 부끄럽지 않을 자신 있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특히 요청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집단에 한정된 말만한다든지. 청중들의 기대를 실망케한다든지, 잡다하고 실속없는 말만을 늘어놓아 문자로 남기는데 문제가 있다면, 별로 얻을 것이 없는 포교라는 것이다.

그리고 단상에 오를 때는 그대로 올라가서 오늘의 제목을 다시 한번 상기한 뒤에 청중들을 쳐다보는 것 등, 사전에 취하여야 마음가짐들이 많이 있지만, 설법자는 시차(時宜) 맞는 내용을 설해야 하고, 지심(至心)으로 설해야 하고, 순서 있게 설해야 하는 등 16가지의 사항들이 요구되며, 아울러서 청법자도, 때에 맞춰서 잘듣고, 즐겁게 들으며, 지심으로 듣는 것 등 똑같이 16가지가 갖추어져야 하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5가지의 부정(不淨)한 설법과 5가지의 청정한 설법을 들고 있는데,

부정한 설법이란, ① 이익 때문에 설하는 것, ② 보답을 받기 위하여 설하는 것, ③ 남 보다 잘하기 위해서 설하는 것, ④ 명예나 지위 때문에 설하는 것, ⑤ 의문이 많은 설법이라고 했고, 반면에 좋은 설법이란, ① 먼저 베풀고 난후 설하는 것, ② 삼보(三寶)의 증장을 위해서 설하는 것, ③ 자기와 다른 사람의 번뇌를 끊는 설법, ④ 삿된 것과 올바른 것을 분별케 하는 설법, ⑤ 청문자가 얻은 것이 많은 설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불장경(佛藏經)에는 5가지의 과실이 있는 설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면,

① 설법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이 자기를 비난하면 어떨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說法時心懷怖畏恐人難我〕.

② 내심(內心)으로 두려움을 느껴서 자기 주장을 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설만을 소개하는 것〔內懷憂怖而外爲他說〕.

③ 이러한 사람은 참된 지혜가 없어서 다른 사람의 말만을 차용하게 되고〔是凡夫無有眞智而爲他說〕,

④ 설한 바가 청정치 못해서 단지 언사(言辭)만이 있을 뿐이며〔所說不淨 但有言辭〕,

⑤ 말에 순서가 없이 곳곳에서 가려 뽑아서 대중들의 마음을 두려워한다〔言無次第處處抄撮 是故在衆心懷恐怖〕는 것인데, 이러한 것들은 설법자가 충분한 지식이 없거나 확신이 없을 때에 흔히 나타나는 마음가짐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유능한 설법자가 되려면, 교학 뿐이 아니고 인접 학문인 수사학, 변론학, 논리학, 심리학, 사회학, 다른 종교학 등까지도 두루두루 섭렵해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설법할 때에 청문자와의 사이에 토론이 전개되었을 경우, 즉 질문을 받았을 적에 그 내용에 따라서 대답하는 예를 보면,

첫째로 일향기(一向記)로서, 상대의 질문이 적절할 때에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며,

둘째로 분별기(分別起)로서, 질문이 이치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먼저 잘 분별하고서 그에 알맞은 대답을 하는 것이며,

셋째로 반힐기(反詰記)로서, 질문을 받고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과 따지는 것을 통해서 상대방의 잘못된 이해를 깨달아 알도록 하는 것이며,

넷째로 사치기(捨置記)로서, 질문이 이치에 합당치 않고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경우에는 이에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해버리는 것이며,

다섯째로 전의법(轉意法)으로서, 상대의 견해를 처음부터 부정하지 않고, 그형식을 긍정하면서 교묘하게 그 내용을 전환시켜서 새로운 의의를 갖게 하는 방법 등이다.

이러한 형식들은 설법자가 그때그때 그 유형을 신속하게 판단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재치와 달변이 요구되는 문답법들이다. 또한 용수의 중론(中論)에 보면 사구백비(四句百非)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사물에 관해서 그 진상을 알리기 위하여 몇 번이고 부정을 거듭하여 유무(有無)의 견해를 명백하게 해주는 문답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부정개발법(否定啓發法)이라고도 하는데, 사구(四句)는 정립(定立)ㆍ반정립(反定立)ㆍ긍정종합(肯定綜合)ㆍ부정종합(否定綜合)을 말한다. 즉, 유(有)와 공(空)으로 만유제법을 판정할 때에, 제1구의 유(有)는 정립, 제2구의 공(空)은 반정립, 제3구의 역유역무(亦有亦無)는 긍정종합, 제4구의 비유비공(非有非空)은 부정종합이며, 처음의 2구를 양단(兩單), 뒤의 2구를 구시구비(俱是俱非) 또는 쌍조쌍비(雙照雙非)라고도 한다. 이러한 4구를 몇 번이고 부정하는 것을 백비(百非)라고 하는데, 이 사구백비를 부(富) 와 현(賢)을 예로 들어서 말하면, 부자나 현명치 못하고(제1구), 현명하나 부자가 아니며(제2구), 부자이면서 현명하고(제3구), 부자도 아니고 현명치도 않다(제4구)는 것이다.

이 형식을 또한 사구문(四句門) 또는 사구분별(四句分別)이라고도 하는데, 변증법의 한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5. 布敎의 형태
포교의 형태에는 몇 가지 있느니, 그 대상에 따라서, ① 개인포교, ② 상담포교, ③ 집단포교, ④ 좌담포교, ⑤ 문서포교, ⑥ 사업포교, ⑦ 의식포교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어느 것이나 그 취지에 맞게끔 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V. 布敎의 功德
공덕이라는 말은 좋은 일을 수행하는 사람을 도와서 이롭게 하므로 공(功) 이라하고, 그공(功)이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다시 돌아오므로 덕(德) 이라는 데서 나온말이다. 그러므로 이는 이타즉자리(利他卽自利)라는 대승사상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으며, 포교가 분명히 이타적인 실천이라면 자기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경전에서 포교가 분명히 이타적인 실천이라면 자기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경전에서 포교사의 공덕을 치하하고 있고, 또한 그 위호를 부처님이 설하고 있는데, 법화경에 보면, "만일 어떤 사람이 악한 마음으로 칼이나 몽둥이, 기와나 돌로 때리려고 하면, 화인(化人)을 곧 보내어 법사를 호위하라"고 했고, 더 나아가서 하늘의 꽃과 향과 보배로운 의복과 천상의 미묘한 보배더미로 설법자에 공양할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포교사는 삼보전(三福田)으로서,
① 부처님을 따르고, 불법을 가르치며, 그것을 실천하는 자이기 때문에 삼보(三寶)의 복전(福田)이고,
② 부모·스승·국가의 삼은(三恩)에 보답하는 복전(報恩福田)이고,
③ 가난한 자와 병든 사람과 구걸하는 사람에게 법보시하는 복전(大悲福田)이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포교사의 말 한마디로 백만억 아승지겁 동안에 받을 생사의 중죄가 소멸될 수도 있고, 법사의 설법 한마디로 80만억 나유타겁 동안 5바라밀을 닦은 공덕 보다도 백·천·만배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뛰어난 공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자오복덕경(현자오복덕경)에 보면,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하느 현자에게는 다섯 가지의 복덕이 있다고 기술한다. 즉,

① 태어나면 장수할 것이요,
② 큰 부자가 되어서 요재(饒財)와 다보(多寶)를 얻을 것이요,
③ 용모가 단정하기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요,
④ 명예가 멀리까지 알려질 것이요,
⑤ 총명해서 많은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으나 결코 광신적이 아니며, 애정에 넘쳐 있으나 감상적이 아니며, 상상력에 불타나 결코 비현실적이 아니며, 두려움을 모르나 생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규율을 몸에 지니고 있으나 결코 굴종적이 아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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