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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 책] 권력형 사회가 아닌 평등형 사회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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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06/02   위클리경향 827호

조국 지음, 생각의 나무 펴냄 
보노보 찬가


침팬지는 수컷 중심의 수직적 권력사회다. ‘보노보’(작은 침팬지 종류·피그미침팬지로도 불림)는 암컷 중심의 평등사회다. 침팬지는 동료들과 싸움을 통해 갈등을 해결한다. 보노보는 사랑을 나누면서 긴장을 풀고 평화를 유지한다. 침팬지의 성인 수컷은 유아 살해 행태를 보여준다. 보노보 무리에서는 유아 살해가 보이지 않는다. 이쯤 되면 당신이 편들고 싶은 동물의 왕국은 침팬지인가, 아니면 보노보인가.

서울대 로스쿨 조국 교수는 정글자본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이라는 정글 속에는 더 많은 보노보가 필요하다”며 <보노보 찬가>(생각의 나무)를 부른다. 한 나라 인권의 기준은 중간값으로 잡지 않는다.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있는가가 기준치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조 교수의 주된 관심사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한 연대요,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분명한 거부다.

‘살색’이 ‘살구색’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우리 안의 인종차별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탈북자, 이른바 혼혈인, 외국인 이주노동자, 난민신청자들이 그들이다. 동성애자인권연대 대표로 활동하는 이가 군에 입대했다. 동성애자 친구에게 날아온 연애편지가 드러난 순간,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되어 에이즈 검사를 받은 후 의병제대할 수밖에 없었다.

극단적인 입시경쟁 매커니즘만 작동 중인 우리 사회에서 아동과 청소년의 인권은 없다. 이들은 훈육되거나 양육되거나 교육되지 않는다. ‘사육’되고 있다는 것이 조 교수의 평가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제도적 아동학대국이고, 우리는 공범이다. 남성우월주의 사회 속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적 대응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햇볕의 평등함에서 소외되어 있는 이들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조 교수의 따뜻한 시선은 나눔이요, ‘번짐’이다.

조 교수의 전공은 형법학이다. 조 교수는 오늘도 자신의 성품만큼이나 겸손한 형법을 꿈꾼다. 폭력성에 근거한 극단적 대응을 경계한다. ‘사형만은 제발’이라고 외친다. 촛불집회 유모차 부대에 대한 수사, 간통죄에 대한 사회적 낙인 등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적이다. 법에서 정치와 도덕을 털어내고 비범죄화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보노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진보의 성찰이 필요했다. 비판을 넘어 진보의 꿈을 재구성하자고 제안한다. 신자유주의와 구별되는 세계화 시대에 한국경제의 나아갈 길에 대해 얘기하자는 것이다. ‘20 대 80’ 사이에서 고통받는 다수에게 어떤 경험과 기쁨을 나누어줄 수 있을지 또한 준비하자고 한다. 솔직하게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고 너는 내게로, 나는 네게로 ‘번짐’의 미학을 실천하자고 나직하게 얘기한다.

15세기만 하더라도, 눈을 가린 채 칼과 천칭을 양손에 든 법의 여신은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소송을 일삼는 사람들을 풍자하는 그림이었다. 그림 뒤에는 광대 모자를 쓴 광신도가 여신을 대신해서 칼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이런 여신이 언제부턴가 사법의 공평성을 상징하는 정의의 여신이 됐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법이라는 이름의 칼과 천칭은 빈자들의 것이 아니다. 보노보들의 것이 아니다. 법은 ‘돈 주고 변호사를 살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침팬지들의 것이다.

법은 동네 시장통에 있지 않다. 경쟁이라는 이름의 시장, 정글 속에 있다. 법전 속에 있다. 법률기술자, 법률장사꾼들의 입 속에 있다. 조 교수는 이런 차별적 관행에 대해 조용한 반란을 꿈꾼다. 그래서 가장 쉬운 말과 글로 인간의 존엄성은 본래 인간의 것이었음을 얘기한다. 자신의 법률가로서의 경험과 영향력을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 그리하여 사랑과 연대의 보노보 사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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