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잡도리함으로 직역할 수 있고 현장스님이 본경에서 지혜로운 주의[如理作意]로 옮긴 이 yoniso manasikāra는 불자들이 사유하는 데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할 부처님의 말씀이다. 예를 들어서 몇 가지를 더 말해보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 특히 불자들이 인간의 의식은 어디에서 생겼으며 또한 사유하는 이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일념이 된다고 하는데 일념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등의 문제를 생각하다가 그러니까 의식의 근저에는 자아 내지는 마음 아니면 불성 아니면 진인(眞人) 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을 두고 부처님은 지혜로운 주의 혹은 여리작의(如理作意) 즉 요니소 마나시까라가 아니라고 하신다. 이것은 바른 사유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는 어떤 바른 대답이 있을 수 없다. 어떤 답을 하든 그것은 견해의 문제에 떨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신이 창조를 했다 하든 극미세 물질이 서로 결합된 상태에 의해서 생긴 하나의 전자파의 현상이라 하든 그것은 모두 견해일 뿐인 것이다. 오히려 분명한 대답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이것에 관한 알음알이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순간에 다른 알음알이로 변해가고 있다’라고만 할 수 있을 것이다.
식(알음알이)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으며 이 식은 어디에서 생겼는가 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알음알이이기 때문에 알음알이로써 알음알이 자체를 바르게 알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양 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모든 유태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유태인이 말했다면 그의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는 구조에 속하는 것이다. 유태인이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그가 유태인이니 그의 말도 거짓말이고 그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도 거짓말이 되고 말며 이리 말하는 것 또한 거짓말이고…이런 순환구조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 그것에 관한 식은 생겨났고 그것은 다시 변하고 있다는 경험에서 온 엄연한 사실일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이 이상을 따지면 벌써 위의 순환구조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식의 뒤에 무슨 불변하는 자성이나 진아가 있다고 생각으로 생각의 꼬리를 물다가 그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 인도의 인명학(논리학)에서도 후대로 내려오면서 신(神)을 상정하여 모든 출발점을 신에게로 돌리고 있다. 이런 모든 사유를 불교에서는 ‘지혜롭지 못한 주의’라 하며 ayoniso manasikāra(아요니소 마나시까라)라고 한다. 이렇게 사유하는 대신에 식은 무엇에 조건지워져서 생겼다가는 멸하고 다시 생겼다가는 멸하기를 반복하는가 라고 그 원인이나 조건을 사유하는 것을 앞 주에서도 인용했듯이 요니소 마나시까라라고 한다. 다시 식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
식(알음알이)은 분명히 조건지워져 생겨난다. 12연기에서는 행(상카라)에 조건지워져 있다고 설명되어 있는데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행은 참 방대하게 쓰이는 불교용어인데 일단 여기서는 넓고 보편적으로 쓰이면서 경에서 거듭 나오는 身口意 삼행(三行)을 뜻한다고 받아들여 고찰해 보자. 우리가 참선을 하게 되면 몸의 들뜬 행과 입으로 짓는 행과 마음으로 짓는 여러 행이 가라앉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알음알이도 바뀌어 가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사실 출입식념경(出入息念經, Ānapān*asatisutta, 안반수의경)에서도 이런 의미에서 호흡에 마음챙기게 되면 삼행이 가라앉는다고 설하고 있다. 식은 아주 촐랑대고 매찰나찰나에 급격히 바뀌기에 이것에 속지 않고 극복하기가 아주 어려울 것이다. 사실 식을 극복하려는 생각 그 자체가 또 다른 식이니 위에서 언급한대로 끝없는 무한소급으로 가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식의 조건인 이 행(상카라)을 가라앉히면 식의 문제는 자연히 극복되는 체계라고 받아들이고 이렇게 사유하면 아주 수행에 아주 도움이 될 뿐더러 더 이상 요술쟁이인 식놀음에 속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육육경(六六經, M148, Chachakkasutta)에 의하면 식은 6내처(6根)와 6외처(6境)에 조건지워져 있다. 우리가 목숨(jīva)을 가지고 있는 한 이 육근 육경 육식의 구도는 피할 수 없겠고 이 셋의 접촉[觸, phassa], 그리고 거기서 생기는 느낌[受, vedan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느낌들이 갈애[愛, taṇhā]로 다시 집착[取, upādāna]으로 전개되어서 우리 삶이 고에 붙박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식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밑도 끝도 없는 구렁텅이로 또 다른 식들을 계속해서 전개시킬 것이 아니라 이런 식·근·경·촉·수·애·취·유·생·노사우비고뇌의 연기구조를 잘 이해하여 고의 소멸을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께서는 사제, 팔정도, 12연기를 정말로 고구정녕히 설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렇게 사유해야 저 두카(苦)를 끝장내고 대자유, 대자비의 해탈열반의 삶을 사는 향상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요니소 마나시까라를 아주 중요하게 설하신 것이다.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문제는 식이 아니라 이 식·근·경·촉·수·애·취·유·생·노사우비고뇌로 연결되어 가는 고리이고 그 중에서도 느낌에 조건지워진 갈애와 취착 그리고 유(존재), 여기에서 비롯되는 엄청난 우비고뇌가 문제일 것이다. 그러니 식이 어디서 생겨났나 하는 또 다른 식을 궁글릴 게 아니라 느낌이 갈애로 발전해서 취·유·생·노사로 발전해가기 전에 바르게 마음챙겨서(sati, 정념) 이를 끊고 뛰어넘는 게 더욱 더 중요한 것이라고 부처님께서는 거듭거듭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부처님시대에도 이미 어부의 아들 사띠(Sāti)와 같은 비구는 이러한 식이 윤회의 주체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부처님께 질문하였고 부처님께서는 이런 질문이 얼마나 무익한 것인가 하는 것을 간곡히 설명해 주셨다.
일단 이런 의문에서 자유로워져야 그때부터 참다운 향상과 참다운 수행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면 또 다른 산냐를 만들면서 거기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영가 스님도 증도가에서 멱즉지군 불가견(覓卽知君 不可見)이라 하셨다. 찾은 즉 그대는 볼 수 없다는 말씀이다. 무언가 실체를 찾고 불변의 존재를 찾으려는 태도, 그런 것을 구해서 얻으려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수행은 요원한 것이 되고 만다는 말씀이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는 이 알음알이(식)를 요술쟁이(māyākāra)에 비유하고 계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요술쟁이인 이 식의 주박에 걸리면 그 요술에 빠져서 결론 없는 희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이해한다.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그 요술의 주박에 걸려버리게 되니까.
그리고 사유하는 이것이 무엇인지 일념은 어디서 왔는지 하는 등의 문제도 사유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념은 어디서 왔는지 하는 순간에 벌써 그런 알음알이의 주박에 걸린 것이다. 단순히 보자. 있는 그대로 보자. 지금 사유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게 바뀌고 있으면 바뀌고 있다 라고 알아차리자. 일념이 되면 된다고 알아차리자. 일념은 어디서 왔는지 하는 순간 벌써 그 알음알이의 주박에 걸린 것이다. 일단 그런 주박에 걸리면 밑도 끝도 없는 그 식의 요술에 놀아나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요술이 끝나면 또 다른 알음알이에 빠지게 되고…이렇게 불쌍한 우리는 요술에 걸려 한평생을 살다가 끝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전식득지(轉識得智)의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하겠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수행의 맛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너무 발제자가 건방진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지만 발제자가 나름대로 초기경들을 읽으면서 처절히 느낀 바이고 이런 너무도 중요한 말씀을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에서 간절히 하고 계시기에 감히 이렇게 적어보고 있다.
이런 지혜롭지 못한(아요니소, ayoniso) 질문과 이런 생각에 빠져있는 위의 사띠(Sāti)와 같은 비구를 초기경들에서 부처님은 mogha-purisa(모가뿌리사)라고 힐난하고 계신다. 이 말은 부처님이 쓰신 말씀 중에서 상대를 가장 나무라시는 단 하나뿐인 경에 자주 나타나는 단어이다. 그 뜻은 ‘쓸모없는(모가) 인간(뿌리사)’이라는 말이다. 귀중한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고서도 향상의 길은 찾지 않고 참으로 밥만 축내는 식충이(밥벌레)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라는 말씀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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