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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회 최상승이란 무엇인가?-산냐를 여의고 발보리심하라 1

금강경/금강경결제발제문-초불연

by 자수향 2009. 4. 7. 13:33

본문

[번역]
14-1. 그때 참으로 수보리 존자는 법력에 [감응되어] 눈물을 흘렸다. 그는 눈물을 닦고서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최고로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최상승에 굳게 나아가는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고, 최고로 수승한 승[最殊勝乘]에 굳게 나아가는 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여래께서는 이런 법문을 설해주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제게는 지혜가 생겼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런 형태의 법문을 전에는 결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이 세상에서] [이런] 경이 설해질 때 듣고서 참되다는 산냐를 일으키는 보살들은 경이로움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면, 세존이시여, 참되다는 산냐, 그것은 참으로 참되다는 산냐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참되다는 산냐, 참되다는 산냐’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 최상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들(agra-yāna-samprasthitānām): agra(Pāli. agga)는 ‘처음의, 맨 앞의, 제일 중요한’ 등의 뜻이다. 구마라즙은 옮기지 않았고 이 전체를 현장은 發趣最上乘者로 옮겼다.

** 최수승승(最殊勝乘)에 굳게 나아가는 자들(śres*t*ha-yāna-samprasthitānām): śres*t*ha(Pāli. set*t*ha)는 ‘최상의, 최고의’를 뜻하는 형용사이다. 전체를 구마라즙은 옮기지 않았고 현장은 發趣最勝乘者로 옮겼다.

구마라즙이 이 두 단어를 옮기지 않은 이유는 아래 15-2에서 다시 나타나기 때문인 것 같다. 축약과 의역을 중시한 구마라즙은 15-2에서 본 경은 爲發大乘者說이며 爲發最上乘者說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2장에서 수보리는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bodhisattva-yāna- samprasthita)’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를 물었고 여기서 다시 최상승과 최수승승(śres*t*ha-yāna)에 굳게 나아가는 자의 이익을 위해서 세존께서는 이런 설법을 해주셨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이 산냐를 극복하라는 가르침이야말로 불교가 불교인 근본 이유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불교가 불교이고 부처님이 부처님인 것은 바로 이 산냐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인도 중원에서 당대에 최고의 경지라고 인정되던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까지 증득하시고도 이를 구경(究竟)이 아니라고 버리신 이유가 이들 경지는 아직 산냐에 걸려 있는 경지라고 지혜로써 간파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6년간의 엄청난 고행을 하시는데 역자는 그 고행을 하셨던 이유를 그런 엄청난 고행을 통해서 산냐를 극복해보려고 하신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고행은 육체에 피로를 더할 뿐이고 마음을 혐오심 등에 머물게 할 뿐 결코 산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아시고 이것까지 버리시고 이제 당신 스스로의 길을 가신 것이다. 그래서 마음챙김(sati)을 확립하셔서 초선에서 4선까지 새로운 선(禪)을 체험하시고 제4선에서 우뻬카사띠빠리숫디(upekkha-sati-pārisuddhi, 捨念淸淨, 평온과 마음챙김의 완전한 청정)가 되어서 이 힘으로 번뇌를 멸절하고 구경의 깨달음을, 저 고귀한 해탈열반을 성취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이 산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셨으면 불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자비, 사랑, 헌신, 정직, 희생, 봉사 등등은 불교가 아니라도 이 세상의 모든 종교, 모든 사상, 모든 윤리에서 강조하고 실천하고 있는 덕목이지 않은가?

이처럼 본경에서는 대승이라는 어휘 대신에 이렇게 최상승(agra-yāna)과 최수승승(śres*t*ha-yāna)이라는 술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남의 구제(보시)를 중시하는 대승적 관점보다는 산냐를 척파하여 구경의 깨달음(무상정등각=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성취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보살(보리살타, bodhisattva)이란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가 깨달음(bodhi)을 향하는 자(sattva)이므로 보살은 중생을 제도하는 자라기보다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라는 측면을 더 강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자비를 실천하지 말란 말인가? 보살행을 하지 말란 말인가? 불국정토를 구현하지 말란 말인가? 불교가 그런 가르침인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여기에 대해서는 불가(佛家)에 전해 내려오는 원효 스님과 그의 아들 설총의 대화로 대신하겠다.
설총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님 가르침입니까?”
원효는 대답했다. “좋은 일 하지 마라.”
“그럼 나쁜 일을 하란 말입니까?”
“나는 좋은 일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너는 나쁜 일을 생각하고 있구나.”

초기경에서 부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어렵게 나는 증득했나니 이제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애욕과 증오로 가득한 자들이이법을실로 잘 깨닫기란어렵다.
흐름을 거스르고 미묘하고 깊고 보기 어렵고 미세하니
애욕에 빠진 자들은 보지 못하리니 어둠으로 덮여 있기에.(M26)

세존의 가르침은 ‘[세속의] 흐름을 거스르는(paṭisotagāmi)’ 가르침이다. 참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문제의식이 투철하고 깊이 사유하고 고뇌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 하겠다.

법이라는 산냐를 가지지 말라고 하니 비법에 집착하고 불국정토의 구현이라는 산냐를 가지지 말라고 하니 보살의 서원을 부정하려 드는 자들은 본 경을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라 하겠다. 참으로 최상승과 최수승승에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자라야 본 경을 읽고 수보리처럼 체루비읍하며 환희용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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