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여기서 6) 지혜가 생겨났습니다(jñānam utpannam)라는 부분을 살펴보자.
구마라즙과 현장은 다 같이 “이전에 생긴 지혜로는(我從昔來所得慧眼과 世尊 我昔生智以來) 이런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로 뒷 문장과 연결해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범어를 그대로 옮기면 이 두 문장은 이런 관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처님께서 최상승과 최수승승에 굳게 나아가는 자에게 설법을 하셨고 그래서 제게는 지혜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런 법문은 제가 전에는 듣지 못한 것입니다.”로 되어 있다. 꼰즈(Conze)도 이렇게 영문으로 옮기고 있다.
‘지혜가 생겨났다(jñānam utpannam)’는 표현은 초기불교에서도 중요하게 등장하는 구문이다. 이미 6장 14번 주해에서도 언급했듯이 초기경에서는 ‘전에 듣지 못한 법들에 대해 눈이 생겼다. 지(智)가 생겼다. 혜(慧)가 생겼다. 명(明)이 생겼다. 광(光)이 생겼다.(S36.25 등)’는 표현이 나타난다. 본 장에서의 ‘지혜가 생겨났습니다(냐남 웃빤남)’라는 표현도 이런 초기경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다. 비상비비상처까지 끝까지 수행자에게 따라붙어서 괴롭히는 산냐! 그런 산냐를 극복하라는 고구정녕하신 세존의 말씀을 알아듣고 드디어 수보리에게 냐나(지혜)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14-3에서 일체 산냐를 멀리 여읜 자들이 참으로 불세존들입니다(sarva-sam*j~nā- apagatā hi Buddhā Bhagavantah*)라고 나타난다.
발제자는 이 구절을 금강경의 중심 되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모든 종교인, 모든 사상가, 모든 철학자, 모든 수행자들이 주박에 걸려있던 저 산냐를 벗어버린 자가 참으로 세존이시다.
수보리가 이렇게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다음에서 거듭 설하시지 않는가, 이런 설법을 듣고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공포를 느끼지 않는 자는 최고로 경이로운 자라고! 그리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바라밀(parama-pāramitā)이라고.
인도사상 내지는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실재론적인 사고에 깊이 집착하여 그 실재하는 것과 합일하거나 그것의 은총으로 행복을 누리려는 구도(構圖)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고정관념을 타파하지 못하는 한 참다운 해탈이란 있을 수 없다. 무엇이 실재한다는 것은 단지 산냐일 뿐임을 지혜롭게 관찰해야 한다.
역자는 결제에 임하는 많은 분들이 반야바라밀이라는 실체를 세우고 있는 것을 보고 솔직히 충격받았다. 특히 스님네들이 어떻게 이렇게 불교를 이해하고 반야를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산냐를 척파하는 것이 반야일 뿐이지 반야의 성품은 따로 있지 않다. 영가스님은 증도가에서 환여피익이투화라 했다. 물에 빠져 죽는 것을 피해 불로 뛰어드는 것을 불쌍히 여기신 말씀이다. 물에 빠졌다가 물에서 나오면 그만이지 왜 다시 불에 뛰어들어 죽음을 자초하는가? 산냐를 극복하면 된다. 산냐를 극복하는 반야의 당체를 세우면 물을 피해 불로 뛰어드는 격이다. 반야가 있기 때문에 산냐를 척파한다면 도법스님의 말씀처럼 도둑놈이기 때문에 도둑질 한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도둑질을 하면 도둑이다. 도둑질을 떠나 따로 도둑놈이 없다. 산냐의 척파를 떠난 반야가 따로 있는 것 아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자리는 최상승을 표방하는 금강경의 본뜻을 고찰해보는 자리이다. 방편을 여의고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논하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두고 고뇌하고 우리는 그대로 살고 있는지 다 같이 반성해보는 자리이다. 불성이 있다. 반야가 있다는 방편적인 말로 산냐의 척파라는 금강경의 본 뜻을 희석해서는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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