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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옮기기 5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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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나는 '이성의 법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성이라는 말은 웬지 차가운데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며 능히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이성의 그러한 점에 대해 혐오의 느낌조차 지니기 마련이다.

 

그러면 이성에 따르는 그 차가움이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이성 속에 무엇인가 우리를 떼밀어 버리는 성질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우리의 일상생활이란 애욕과 증오의 소용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소용돌이를 떠나 제 3자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눈은 필연적으로 지성적인 맑음을 지닐 수 밖에 없기에 그 눈초리(이성)에서 받은 인상은 차가울 것이다.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일상 생활이란 자타(自他)의 대랍 속에 파묻혀 있는바, 그런 대립 속에서는 앞에서 말한 에고가 저마다 자기를 주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성은 그 대립을 떼밀어 젖히고 냉정히 자아를 바라보는 것이기에 그 눈초리는 차가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차갑다고 해서 반드시 나쁘다고는 하지 못하리라. 열에 들떠 있는 소용돌이 속에서 인류를 건지는 것이 있다면 그건 차갑고 맑은 이성의 작용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감히 말하거니와 불교는 어딘지 차가운데가 있다. 붓다 그 분의 말씀을 놓고 보아도 차가움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이 인생이란 결국 괴로움이다. 너희는 먼저 이 사실을 확고히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가르치는 붓다의 말씀에는 우리로 하여금 섬뜩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만약 그런 붓다의 말씀을 읽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글자의 표면만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또 붓다의 탐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마치 마른 풀로 만든 횃불울 들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달리는 것과 같으며 만약에 빨리 그 횃불을 던져 버리지 않는다면 그 불은 그의 손과 그의 온몸을 태우고 말리라고 , 적어도 진지하게 이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 누가 가슴이 섬뜩해 오지 않겠는가.

 

또 [법구경]의 한 게는 붓다의 가르침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제가 악을 행하여, 스스로 더러워지고, 제가 악을 떠나서 스스로

청정해진다. 저마다 스스로 청정해지고 부정해지나니, 사람은 남을

청정하게 하지는 못하리."

 

인과필연(因果必然), 응보무정(應報無情)! 그 도리에 틀림은 없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차갑게 말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두루 사람에게 위안을 줄 수 있도록 말을 꾸민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구원은 될 수 없는 것이겠다. 적당히 얼버무리는 말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오직 전략의 길이 있을 뿐이다. 또는 가공(架空)에 취하고 환상을 뒤쫓는다면, 구제의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어떤 천국, 어떤 극락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자기만 의지하면 어떤 죄라도 소멸한다는 그런 계약을 남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영생을 제공하므로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만족 시켜 주려고도 않는다.

 

붓다는 그런 환상과 오류와 비합리적인 것을 일체 부정하고 타파하였다. 그리고 나서 비정하리 만큼 냉철한 눈을 가지고 존재와 인간의 진상을 관찰하고 투시하였다. 그리고 그위에 참다운 구제의 길을 세웠다. 그런 뜻에서 보면 붓다가 간 길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 구제의 대업을 신에게 의탁하지도 않았고 기적에 맡기지도 않았다.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이성, 그것에 의해 구제의 길을 발견하고 확립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붓다가 왕에게 설한 게의 문구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겠다. 붓다는 그 왕과 왕비가 말하는 에고를 그대로 인정하고 나서 ,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는 더 없이 소중하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누그라도 할 수 있는 말처럼 생각될지 모르나 불교를 가능케하는 '이성의 법칙'의 하나가 그것을 통해 설명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붓다가 구상한 이성의 영위에는 주로 두 가지 측면이있다고 생각된다. 그 하나는 애욕과 증오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덕이고 잇는 자기를 제 3자의 처지에 서서 냉철하게 관찰하는 일이다. 무상,고, 무아의 원리는 이런 작용 속에서 발견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자타의 대립 속에 서 있는 자기를 떠나 그와 나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 내가 소중하듯이 그에게도 그가 소중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만약 인간이 이러한 이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기 愛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아마도 인간의 세계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해 이리"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붓다는 우리의 세계가 그런 수라장이 안되게 하기 위해서는 저마다 이성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해서는 안 된다,"

 

파세나디왕에게 설해 준 게의 걸구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고 보여진다. 즉 모든 사람이 서로 이해를 따라 아귀다툼하는 상태를 종식시키고 이 세계를 평화의 고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이성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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