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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옮기기12회(09.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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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의 성제

2) 고의 발생의 성제

3) 고의 멸진의 성제

4)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

 

이전부터 불교인들은 이것을 간략히 하여  '고,집,멸,도'의 사제라고 했다. 둘째 것을 '집'이라고 한것은 한역에서는 예전에  '발생'을 '짖기'라고 번역했던 까닭이다.

이것을 종합해보면 비로서 '네가지 성제'라고 불리는 설법의 구조가 이해가 된다.

붓다는 먼제 네개의 단언적인 명제를 내세우고 나서 그것들을 순차적으로 설명해 갔을 것이 틀림없다. 맨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이는 고이다.' 또는 '이것은 고의 성제이다.'라는 명제였다.  이것은 과제의 제시이다. 인생의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는 생,노,병,사 즉 사고가 모든 사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법구경]의 게(128)를 가지고 말한다면 이렇게 된다.

 

   하늘 위로 오르고, 바다 밑에 잠기고

   산골짜기 깊숙한 동굴 속에 숨는대도

   죽음의 검은 손이 미치지 않는

   그런 곳은 이 세상에 있음 없어라.

그것뿐이 아니다. 미워하는 사람과도 만나야 한다(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질 때가 온다(愛別離苦). 또 채워지지 않는 욕심도 허다하다(求不得苦). 우리의 일상생활이란 괴로움으로 뒤덮여 있지 않은가! 붓다는 이런 현실에 갑자기 생각이 미쳤을 때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저 크나큰 포기를 감행했던 것이다. 이런 현실 위에서 "이는 고이다."라는 제1명제가 세워지기에 이른 것이다.

 

두번째로 제시된 명제는 "이느 고의 발생이다'" 또는 "이것은 고의 발생의 성제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런 인생의 현실을 통찰한 다음 그 발생의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그것은 얼른 보기에 저항할 길 없는 운명인 듯이 생각된다. 그러나 만약 거기에서 멈추고 만다면 우리는 무력한 운명론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궁지에서 벗어 날 수 있겠는가? 대체 그것을 극복할 방법은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것은 무었일까? 이것이야 말로 붓다가 목숨을 걸고 추구했던 문제였다. 그리고 그의 크나큰 깨달음이 이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물음은 연기의 법칙, 즉 일체의 존재는 어떤 조건(인연)에 의해 이루어졌고, 따라서 자아니 실체니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리에 의해 훌륭히 해결이 났던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깨달음의 경지에서 볼 때 인생을 괴롭게 만드느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이 갈애(갈애),즉 목마른 이가 물을 찾는 것에나 비겨야 할 불타는 욕마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제시된 것은 " 이것은 고의 멸진의 성제이다."라는 명제이다. 인생이 욕망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괴로운 것이 되었다면  무엇으로 이런 우리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것에는 오직 한 가지 방법, 불타는 욕망을 가라 앉히는 길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세번째의 명제이다. [법구경]에서

   

    모름지기 이 길을 걸어간다면

    괴로움이 마침내 스러지리라.

    욕망의 화살을 뽑아 버리고

    깨달아 나는 이를 설함이로다.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인생을 고통으로 가득차게 하는 원인이 갈애에 있다는 것이라면 , 그것을 철저히 뿌리 뽑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평범하여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것에는 기적도 없고 신비도 없다. 그것을 서운하게 여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붓다란 그런 분이며 불교란 그런 종교이다.그것을 후세의 불교인들은 "불교에는 불가사의가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붓다 이전에 이 당연한 이치에 눈 뜬 사람이 있었던가? 평범하다면 평범하지만 위대한 평범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본래 진리란 그런 것이다. 당연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다고 하는 것이 우리네 범부라면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진리요 깨달음인 것이겠다.

 

네번째로 제시된 것은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 또는 "이것은 고의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 라고 하는 명제이다. 이것은 실천론이다. 제3의 명제에 의해 수립된 원칙에 입각하여 고를 없애기 위한 실천방법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며 이것을 모두 전 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극단을 떠나 중도 입각하는 실천 곧 관찰(正見)과 행위(정사,정어,정업)과 수행(정정진,정념,정정)에 관한 여러 항목을 열거한 것이다.

 

마가다야의 나무 그늘에 앉아서 붓다가 다섯 비구들에게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이 "네가지 성제"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도 붓다는 그 단언적인 명제들을 먼저 제시한 다음에 차례차례 설명을 덧 붙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들이 결코 그들 다섯 비구에 의해 대번에 이해 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낡은 문헌 이를테면 ([중부경]26성구경)의 기록도 그런 사실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다.

 

"이리하여 두 명의 비구에게 설명할 동안은 다른 셋이 나가서

탁발하여, 세사람의 비구가 탁발해 온 것을 가지고 여섯명이

살았다. 또 세명의 비구에게 가르치고 있을 때는 두 사람의 비구가

탁발하여, 그들이 얻어 온 것으로 여섯이서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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