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건대 붓다가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시기까지의 거리는 매우 멀었다. 그러나 일단 확신을 가지고 전도를 떠나라고 말했을 때, 거기에 나타난 전도의 정신은 일체의 제한을 넘어서 모든 생물에게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붓다는 '이방인의 길로 가지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또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자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오직 모든 세상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人天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가라고 타일렀다. 그것은 참으로 붓다다운 전더의 선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정신을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이 대목의 마지막 말씀 즉 "둘이 한 길을 가지말라."는 구절이다.
내가 이 구절에 특히 주목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전도선언'때문이다. 그는 앞에서도 인용했듯이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야에게로 가라."(마태복음 10:6)
고 말했던 것이다. 또 다를 복음에는
"열 두 제자를 불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마가복음6:7)
라고 나와 있다. 나는 이것을 그것에 비교하여 하나를 높다하고 다른 것을 못하다고 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이들을 비교함으로써 그 하나만 읽어가지고는 좀처럼 밝혀지지 않던 뜻이 명확한 형태로 눈앞에 떠오름을 늒게 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예수는 그때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公會)에[ 넘겨 주겠고,저희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그러기에 전도하러 떠나는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도 가르쳐야 했다. 거기에는 도저히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이 있었다. "둘씩 둘씩 보내시며" 라는 표현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겠다.
그리고 이런 것과 비교해 볼 때 "둘이서 한 길을 가지말라."는 붓다의 말씀의 뜻도 스스로 명백해 진다. 여기에는 박해의 예상이란 조금도 없었음이 확실하다. 오직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가는 것이니까. 또 사람들이 그들을 공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도 생각되어 있지 않다. 오직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이 법은 설해지는 것이니까. 그리고 이런 전도의 정신은 붓다의 전 생애를 일관하여 실현되었을 뿐아니라 또 수천 년에 걸친 불교의 역사 속에 지속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불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아시아 대부분에 전파되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 전도는 평화와 환영 속에 수행되었고 불교의 이름 밑에 피를 흘린 역사는 거의 없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모두가 교조 붓다의 정신을 이어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붓다의 "전도선언"에서 둘째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설법의 이상적인 양상이 제시된 대목이다. 거기에는 먼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라고 설해져 있다. 이것을 후세의 불교인들은 간략히 '初中終의 선'이라고 불렀다. 또 '조리와 표현을 갖추어서 법을 설하라.'고 되어 있기에 이를 '義文具足'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밖에도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수행'을 설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예수가 열 두 제자를 떠나 보내면서 한 말에 비길 때 흥미 진진한 바가 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이를 고치며, 죽은 이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 내라."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선교의 임무였다. 또 공회에 넘겨졌을 때는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 성령이시니라."
고 했다. 기독교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신령에 충만하여 신령의 말을 매개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붓다는 조리가 분명한 아리따운 변설을 요구하였다. 여기에서도 나는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고 할 뜻은 없으니, 두 성인의 설법에 대한 요구가 크게 대조를 이루고 있는 점에 깊은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버쳐(Butcher)의 저서 [그리스 정신의 여러 양상]이 그리스인의 웅변에 대해 언급한 대목을 되세기게 한다. 그들이 토론을 좋아하고 웅변을 사랑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며 또 그 웅변이 그들의 합리적인 정신과 예술적인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도 자주 이야기되어 왔다. 버처는 그런 사실들을 자세히 서술함과 아울러 다시 그 청중과 변사에 대해서도 아주 구체적인 소식을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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