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청중들은 마치 음악에라도 홀린 듯이 그 아름다운 말에 도취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그 매력 때문에 속는 일이 없기 위해 신중히 경계함을 잊지 않았다. 허점을 찔러 오는 논법에서 자기를 지키고 궤변을 간파하려고 했다. 이같이 엄격한 청중에 대하여 변사는 십분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것은 특히 연설의 끝에가서 으례 있기 마련인 저 흥분없는 고요한 어조에 의해 표시 되었다. 그것은 현대인이라면 냉철함이라고 받아 들일 지 모르는, 겉으로 보기에 점차 나직해 가는 어조였거니와 그 흥분없는 고요함이야말로 웅변이 청중의 이성에 대해서 표시하는 일종의 경의임에 틀림없었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을 향해, 그는 마지막 호소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의 본 고장인 그리스인으로서 참으로 어울리는 웅변양식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붓다가 생각한 이상적인 설법의 양상도 역시 마찬가지로 호모사피엔스의 입장을 취하는 그것이었다. 그것은 노호하고 절규하는 예언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를 방식이었다. 또 신령에 충만하여 권위있는 듯이 말하는 종교가의 그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격렬한 말을 내뱉아 청중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는 연설 태도와도 전혀 궤를 달리 하고 있었다 . 그리스 인의 웅변이 흥분없는 고요한 어조로 끝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면, 여기에서도 또한 처음과 중간과 결말을 일관하여 잘 설해 질 것이 요구되었고, 또 이론과 내용의 구비와 이성을 가지고 고요히 이성을 향해 호소할 것이 요청되었다. 거기에는 붓다의 사람됨과 그 사람의 성격이 단적으로 나타나 있는 듯이 생각된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 '전도선언'의 셋째 부분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붓다가 금후의 예정을 말씀한 대목이다.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베라의 세나니가마로 가리라."
그곳은 붓다가 진리를 깨달은 보리수 근처의 마을이다. 우루베라로 부터 바라나시까지 왔던 붓다는 이번에는 다시 우루베라를 향해 돌아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건대 그 곳은 붓다로서는 가장 추억이 많은 고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이 새로운 가르침의 씨가 아직 한 알도 뿌려지지 않았다. 먼저 그 마을로 돌아가자, 이렇게 생각했을 붓다의 심정을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같다.
(7) 인간성
이에 세존은 그들 사캬족 사람들을 밤중까지 가르치고 인도하고 격려하고 기쁘게 해 준 다음 ,존자 아난다에게 이르셨다.
"아난다여, 너는 나를 대신하여 카필라바투의 사캬족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도를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다시 법을 설해 주려무나. 나는 등이 아프다. 잠깐 누어야겠다."
아난다는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세존은 옷을 넷으로 깔고, 발에 발울 포겐 다음 정념(正念),정지(正智)를 지니신 채 오른쪽 겨드랑이를 아래로 하고 누우셨다.
([중부경전] 53 유학경, 한역동본,[잡아함경] 43:13 漏法(루법))
이제 나는 붓다 고타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 문제를 앞에 놓고 매우 당돌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그의 일기 속에서 한 말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신과 인간의 관계는 전혀 성질을 달리한다. 인간과 인간은 오래 함께 살아서 깊이 알게 되면 될수록 그 사이는 더욱 더 가까와진다. 그러나 신과 인간의 관계는 그와 전혀 반대이다. 인간이 신을 사랑하면 할수록 신은 더욱 무한한 것이 되고 인간은 더더욱 작은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 신과 함께 장난하며 놀 수 있을 듯이 생각했다. 자란 뒤 내 열정을 바쳐 그를 사랑한다면 신과의 교섭도 실현되려니 꿈꾸었다. 그러나 다시 나이를 먹어 가면서 나는 신이 얼마나 무한한 존재인지, 신과 인간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참으로 인상이 깊었다. 내가 이 대목을 읽은 것은 벌써 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나는 기회있을 때마다 그 일절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불교도인 우리가 보기에는 사정은 아무래도 그 반대일 것만 같다.
붓다와 우리의 관계는 인간의 관계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우리가 붓다에게 다가가서 그 분을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록 붓다는 우리에게 더욱 친근한 존재가 될 것이다. 나는 어린시절, 붓다는 전혀 딴 세계에서 살고 계셔서 이따금 구름이라도 타고 이 세상에 나타나시는 분으로 여겼다. 그러던 그 분이 어느 사이엔가 점점 나에게 가까운 , 그리고 아주 친한 사이처럼 느껴져 왔으니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의심할 나위없이 붓다 또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던 까닭이다.
이 일과 관련해서 지금도 생각 나는 것은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한 일절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의 일이다.
이야기옮기기 17회 (0) | 2009.03.15 |
---|---|
이야기옮기기 16회(09.3.14) (0) | 2009.03.14 |
이야기옮기기 14회 (0) | 2009.03.12 |
이야기옮기기-13회 (0) | 2009.03.11 |
이야기옮기기12회(09.3.10) (0) | 2009.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