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불교 경전이나 논서에 등장하는 비유가 있다. 좀 각색해서 적어보자면,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주먹을 쥐고 신도들에게 이야기하기를 지금 내 주먹 속에는 엄청나게 값비싼 마니 보배구슬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의 반응은 다양할 것이다. 제일 처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반응은 의심일 것이다. 정말 저 속에 엄청나게 비싼 보배가 있을까 하는 의심, 그러다가 몇몇 사람은 곧 ‘그래 저 분은 거짓말을 잘 하지 않으니까 정말일 거야’ 하는 소위 말하는 믿음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의심을 할 것인데 내가, 아니 내가 만든 무시무시한 폭력조직이 만일 칼이나 총을 들이대고 이것을 믿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목숨을 구하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을 표할 것이다. 무조건 믿~씁니다 할 것이다.
사실 일반 종교에서 절대자를 가설하고 제시하는 믿음은 이런 수준이라고 발제자는 감히 말하고 싶다. 아무도 신을 본 사람이 없다. 그리고 설혹 신을 봤다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아니고 내 육근(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대상일 뿐이고 육근이 변함에 따라 그 인식도 변하고 이 세상에 있는 대상이라는 것도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마련이니 그 신은 무상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와 폭력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신물나도록 보아온 것이 아닌가. 인간이, 내가, 혹은 우리 집단이 믿는 절대자나 신념이나 가치체계의 우월성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남보다 우월하려는 발상 자체가 무지에서 나온 소치이겠지만) 불행히도 폭력뿐인 것 같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성전(聖戰)을 빙자한 수많은 종교전쟁을 우리 인류는 목격해온 것이다.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까 믿을 수밖에 없다는 이런 유의 믿음을 서양에서는 belief라고 하는 것 같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절규가 바로 belief의 의미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고 생각한다. 주먹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그냥 믿을 수밖에 없는 경지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belief의 문제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본 자는 ‘본다, 보았다’고 말하지 ‘믿는다, 믿~씁니다’라고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총칼을 들이대고 믿지 않으면 죽인다고 했을 때 생기는 믿음을 발제자는 faith의 측면으로 보고 싶다. faith란 충성에 가까운 개념일텐데 군신이나 주종관계를 성립시키는 바탕이 faith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진심에서 나온 것이 faith이겠지만 좀 의문스러운 시각으로 그 심리현상을 관찰해본다면 아무래도 죽임이나 보복, 해코지에 대한 불안한 심리가 배경이 된 것이 이 faith일 거라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신내린 무당이 강림한 신에 대해서 가지는 심리상태라고 말하면 너무 극단적일까. 그러니 절대자를 설정하는 모든 종교는 어쩌면 이런 faith가 가장 기본이 되는 믿음구조를 갖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래서 절대자를 가설하는 종교는 알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 be- lief와 모든 파워와 생사여탈권을 가졌다고 믿는 그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에 기인한 faith가 시작이요, 끝일 수밖에 없다고 감히 생각해 본다.
반면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주먹을 맹목적으로 믿는 게 아니고 그 주먹을 열어서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如實知見]’이다. 주먹을 펴 보이게 되면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명명백백히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belief나 faith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불교는 ‘와서 믿으라’는 가르침이 아니고 ‘와서 보라(ehipassika)’<<주: ehi는 ā([이곳을] 향하여)+√i(to go)의 명령형으로 ‘오라’는 뜻이요, passika는 √dr*ś(to see)의 명사형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는 가르침이다. 보면 알게 되고 알면 속지 않게 된다. 보아서 알게 되어 생기는 편안함, 즐거움, 가벼움, 밝음, 고요함, 그래서 생기는 확신, 이런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인 것이다.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자나띠(jānāti, 안다)와 빳사띠(passati, 본다)라는 두 단어가 함께 수없이 많이 등장하고 이 두 단어가 합성해서 생긴 명사 냐나닷사나(~nān*a-dassana, 知見)라는 용어도 중요한 술어로서 많이 나타난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맹목적 믿음보다는 보고 아는 것을 중요시하고 이것을 신행의 출발로 삼고 있다 하겠다.
그러니 불자는 먼저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신뢰가 생기고(삿다), 내 삶에 적용시키면 편안함과 밝음이 생기고(빠사다), 그러면 태산부동의 확신(아디목카)이 생기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참다운 불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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