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붓다는 이런 괴로움을 있게 하는 조건으로 갈애를 지적하고, 그것에 대해 간명한 해설을 베풀어 갔다.
그 해설도 다시 두 부분으로 가를 수 있다. 갈애의 상황을 말한 것과 그 종류를 열거한 부분이 그것이다.
먼저 그 첫째 부분에 대해서는
"후유(後有)를 일으키고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여 이르는 곳마다 그것에 집착한다."
고 설명했다. 이 중에서 "후유를 일으키고"라는 말은 현대인의 표현으로는 쉽게 나타내기 어려운 뜻을 내포하고 있다. 후유라는 말은 내생에서 윤회를 되풀이 하는 존재라는 뜻이어서, 결국은 미망(迷妄)의 인생을 반복한다는 정도의 뜻이다. 그리고 그 씨 (원인)가 되는 것이 갈애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여 이르는 곳마다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이것을 한역에서는 "희탐구행(喜貪俱行) 수처환희"라고 했다. 그 대상을 가리지도 않고 욕심을 내어서 그칠 줄을 모르는 상태를 말한 것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 부분은
"그것에는 욕애와 유애와 무유애가 있다."
고 되어 있다. 이것은 갈애의 분류인 바, 그 분류의 솜씨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하나는 성(性)에 관한 욕망(욕애) , 둘째로 지적된 것은 개체 존속의 욕망(유애), 셋째 것은 명예,권세에 대한 욕망(무유애)인 바, 이 분류 방법은 오늘에서도 근본적으로는 정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그것은 이를테면 홉즈(1588~1679)가 인간의 온갖 욕망을 세심히 검토한 끝에 그것들을 가장 소박한 형태로 환원시켜서 자기 보존의 욕망, 자기 연장의 욕망, 명예와 권세같이 남의 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 그는 그것을 허욕(vanity)이라고 했다.- 이 셋으로 나눈 것을 생각케 한다.
어쨋든 붓다는 여기에서 괴로움을 생기게 하는 조건을 발견하여 그것을 상세히 검토하였다. 그러면 그 조건이 되는 갈애를 어떻게 처리 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이 셋째와 넷째의 성제인 것이다.
(6) 이는 고의 멸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고의 멸진의 성제이다. 마땅히 알라.
이 갈애를 남김 없이 멸하고 버리고 벗어나서, 더 이상 집착
함이 없기에 이르는 일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
마땅히 알라. 성스러운 八支의 길이니,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 그것이다."
([상응부경전]56:11 여래소세 한역동본 [잡아함경]15:17 전법륜])
이것이 사제 후반의 두 가지 성제에 대한 설법이다. 이제 전반의 두 명제와 후반의 두 명제를 따로 나눈 것은 붓다가 그렇게 구분하여 설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를 볼 때 일단 그 분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에 든 '연기의공식'을 여기에 적응시켜 본다면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다." 또는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는 공식의 전반 부분이 쓰이고 있는 것은 사제 전반의 두 명제이다. 그리고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다." 또는 "이것이 멸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는 후반의 공식이 응용된 것은 이 후반 부분인 멸, 도의 두 명제라고 할 수 있다. 또는 그 전반은 고의 발생에 관한 이론적인 부분, 그 후반은 고의 멸진에 대한 실천적인 부분이라고도 나눌 수 있겠다.
어쨋든 "이는 고이다."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만드는 조건을 갈애라고 단정한 이상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되느냐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연기의 공식'의 후반 부분이 응용되어 "무엇을 멸함으로 말미암아 고를 멸할 수 있는가?"라고 추궁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대답이 "이 갈애를 남김없이 멸하여 더 이상 집착함이 없기에 이르는 일"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갈애 때문에 생긴 괴로움이니까 이것을 제거하면 된다는 이론이다.
그것은 참으로 간단 명료한 답변이다. 너무 간단 명료해서 도리어 싱겁다고 할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인생의 괴로운 양상이란 천차 만별하고 다기 다양한 것이기에 도저히 이처럼 간단하게 처리될 수는 없다고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다기 다양한 것을 쾌도로 난마를 베듯 풀어 버리는 것이 지혜라고 감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나는 붓다의 정각을 말하면서 뉴턴이 만유인력을 깨닫던 순간을 보기로 든 바 있거니와, 그 후 뉴턴에 의해 정리된 인력의 법칙은 간명했을 지는 몰라도 저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어떤 멸 하나도 망라하지 못함이 없었던 것이니, 그것이 과학자의 지혜임에 틀림없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붓다에 의해 정비된 사제의 명제 또한 간단 명료하면서도 무릇 인생의 모든 양상에 적응해서 어느 하나라도 새어 나가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붓다가 설하신 것을 지혜의 가르침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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