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변화해 마지 않는 것을 마치 영원 불변한 듯이 착각하는 것도 그것이다. 붓다는 일찍이 이런 게를 설한 일이 있다.
법에 의해 이익을 얻지 못함과
비법(非法)으로 이익을 얻는 그것은
어느 쪽이 낫다고 하여야 하랴.
법대로 행하여서 얻지 못함은
비법으로 얻음보다 훨씬 나아라.
깨달은 것 적으면서 높은 명성과
깨달은 것 많고도 낮은 명성은
어느 쪽이 낫다고 하여야 하랴.
지혜가 많고도 낮은 명성은
적고도 높음보다 훨씬 나아라.
그것이 바른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는 자칫하면 '비법으로 이익을 얻는 일'에 몰두하기 쉽고, "지혜가 적으면서 명성이 높기"를 바라기 일쑤이다. 그리하여 이런 전도된 사고 방식은 인생의 모든 영역을 채워 버려서 사람들을 미망과 죄악 속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이런 것을 '사전도'라고 한다.이것은 불교의 입장에 서서 인간이 빠지기 쉬운 잘못을 네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첫째, 상(常)전도------- 이 무상한 존재를 영원한 것인양 잘못 생각하는 것
둘째, 낙(樂)전도------- 고(苦)라고 보아야 할 인생을 즐거운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
셋째, 정(淨)전도------- 이 부정한 인간 존재를 청정한 것인 듯 잘못 생각하는 것.
넷째, 아(我)전도------- 이 무아(무아)인 존재를 자아가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것.
그리고 이런 전도가 생기는 이유를 추궁할 때, 결국은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이런 장애물을 불식하여 이 전도에서 떠나지 못한 다면, 마침내 '정(정)'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조건이 되는 것은 "극단을 떠나는 일"이라고 지적된다. 한역 경전의 표현을 따른다면 "가를 떠나 한 가운데에 서는 일(이변처중 離邊處中)"이다. 앞에서 인용한 첫 설법에 "비구들이여, 출가한 사람은 두 극단을 피해야 하느니라."고 나와 있던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극단'이라고 번역한 것은 팔리어로 말한 다면 anta(끝,가)인바 , 한역에서는 편(偏) 또는 변(邊), 단(端)이라고 번역되었다. 이 '변'을 떠나 '중(中)'에 서는 곳에 '정'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조건을 가지고 '정(正)'을 규정한다는 것은 다른 데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매우 불교적인 사고 방법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아마도 붓다의 절실한 체험으로부터 이런 조건들이 생겨 았으리라 생각된다. 그 체험이란 붓다가 정각을 이루기에 앞서 온 힘을 기울여서 고행에 매진하던 일을 말한다.생각건대 극단으로 달린다는 것은 어딘가 인간의 깊은 데에 뿌리박고 있는 경향인 것 같다. 우리의 생각은 자칫하면 극단으로 달리기 쉽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자기가 위대해지거나 란 듯이 좋아하는 점이 없지 않다. 이를테면 정치적인 견해만 하더라도 ,좌냐 우냐 확실히 그 입장을 가르려고 드는 것이 우리다. 그리하여 그 노선을 일단 택하고 나면 그것에 대해 미심쩍은 일이 있던 말던 그것을 끝까지 밀고 가려 든다. 우리의 처지에 알맞은 융통성 있는 입장이라는 것은 웬지 기회주의 처럼 생각되어 비위에 맞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 어느 극단으로 달리는 것은 인간의 약함을 숨기려는 행동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붓다 조차도 한때는 이런 인간적인 약점에 사로 잡혀 있었다는 것을 붓다의 전기는 우리에게 똑똑히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고행에 열중하여 그것으로 길을 타개하려고 했던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이윽고 고행에 매달리는 것이 바른 길이 아님을 자각하여 경연히 버렸던 것이지만 ,그 체험이 이제 여기에 '정(正)'의 조건으로서 알려진 것은 아니겠는가.
한 경([잡아함경]9:30:20 억이. 팔리어 동본, [증지부 경전]6:55소나)응 이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있는 문답을 전해 주고 있다.
붓다의 제자 중에 소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아주 험한 수행을 계속했건만 아무리해도 깨달을 수가 없었다. 도리어 망상만이 일어니서 그를 괴롭혔다. 그것을 아신 붓다는 그를 찾아가서 물으셨다.
"너는 집에 있을 때, 무슨일 을 잘하느냐?"
"대덕이시여, 거문고를 좀 뜯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소나야, 거문고 줄을 아주 팽팽하게 죄면 어떻더냐? 켜기에 좋더냐?"
"대덕이시여, 너무 팽팽하면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소나야. 아주 허술하게 하면 어떻드냐?"
"대덕이시여, 그리해도 안되나이다."
"소나야, 네 말대로다. 거문고 줄이 너무 팽팽하거나 너무 허술해서는 좋은 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다.
도(道)의 실천도 그와 같으니라. 쾌락에 빠지는 일이나 고행을 일삼는 것은 다 바른 태도는 아니다.
또 지나치게 서둔다면 고요한 심경을 기대할 수 없고, 너무 긴장을 푼다면 게을러지기 쉽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에 설 때 바른 실천이 이루어진다는 것, 이것이 불교의 실천의 핵심이 되는 이른바 '중도'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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