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는 고(苦)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성제이다. 마땅히 알라. 생(生)은 고이다.
老는 고이다. 병은 고이다. 죽음은 고이다. 미운 사람과 만나는 것도
고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요, 욕심나는 것을 얻지 못하
는 것도 고이다. 통틀어 말한 다면 이 인생은 바로 고 그것이다. 비구
들이여, 이것이 고의 발생의 성제이다. 마땅히 알라. 후유(後有)를 일
으키고,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며, 이르는 곳마다 그것에 집착하는 갈애
(渴愛)가 그것이다. 욕애(慾愛)와 유애(有愛)와 무유애(無有愛)가 있다."
([상응부경전]56:11 如來所說여래소세, 한역동본 ,[잡아함경]15:17전법륜)
前章에서 나는 연기의 원리에 대해 누누이 설명한 바와 있거니와 아마도 무미 건조하게 느껴져서 그런 이야기가 인생을 더 나아지게 하는데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생각했던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붓다는 그 원리를 깨닫는 순간 '이젠됐다'고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기야 '이젠됐다'는 따위의 점잖치 못한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을 테지만 붓다는 그것에 대해 인생의 모든 과제를 풀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게 된 것이므로 매우 기뻐했을 것은 사실이겠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하여 연기의 원리가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어 헤치는 열쇠가 된다는 말인가?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연생의 법칙"이라는 말 속에 설명되어 있다. '연생의 법'이란 조건이 있음으로 발생한 것이라는 정도의 뜻이어서, 말하자면 실체로서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 있기 때문에 이것 또는 저것이 존재한다. 그러기에 영원, 불면하는 것이란 인정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조건에 의해 존재하는 까닭에 그 조건의 소멸은 바로 그 존재의 소멸도 뜻하게 된다는 것, '연생의법'이란 이런 이치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붓다의 과제가 되었던 고니 생로병사니 하는 것은 어찌될까? 일체의 존재가 조건에 의해 성립되었다면 그런 존재의 성질에 불과한 고나 생로병사가 영원불변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바이다. 그러므로 붓다가 "고는 연생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고의 고유성, 실재성의 부정이라고 보아야 되는 것이겠다. 고도, 생로병사도 어떤 조건에 의해 생겼다면, 그 존재를 변경시킴으로써 그런 것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뜻이 "고는 연생이다."라는 말씀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그 말씀은 인생문제를 해결한 붓다의 개가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이 장의 첫머리에 인용한 글은 이른바 '사제'에 관한 설법의 전반부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제설은 바라나시교외 이시파타나미가다야(녹야원)에서 행해진 첫 설법의 주제였고, 또 붓다의 일생을 통해서 그 사상의 골격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 사제 설법 중에서 먼저 그 전반의 두 절을 떼내어 검토할 때, 거기에는 극히 명쾌한 표현으로 먼저 문제를 제시하고 난 다음 조건이 설명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성제이다."
붓다는 아마도 미리 네 가지의 항목을 세워 놓은 다음 차례차례 그것에 대해 설명을 덧붙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 네 가지 항목이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 고의 성제
2)고의 발생의 성제
3)고의 멸진의 성제
4)고의 멸진에 이르는 성제이다.
또는 '제'라 함은 단언적 명제라는 뜻으로 그것은
1) "이는 고다."
2) "이는 고의 발생이다."
3) "이는 고의 멸진이다."
4)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
라는 형식으로 제기되었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사실 그런 표현도 붓다의 말씀이라 하여 자주 여러 경전 속에 나오고 있다. 어쨋든 붓다는 먼저 문제부터 제시했다. 그것은 원래 붓다가 출가 당시에 지니고 있던 자신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어쨋든 붓다는 먼저 문제부터 제시했다. 그것은 원래 붓다가 출가 당시에 지니고 있던 자신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제는 붓다 개인의 과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류의 과제임에 틀림없다. 하기야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과제로 자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마땅히 만인의 과제가 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겠다. 이 당연한 것, 괴로움으로 자각하고, 인생을 있는 그대로 진상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기실 불교의 기초임에 틀림없으리라.
이것 없이는 불교는 그 첫발 조차도 내 디딜수 없는 까닭이다. 이 자각이야말로 붓다를 몰아 지리 탐구로 달려가게 한 동기였다면 그것은 전 인류에게도 인생을 대하는 기본 자세이어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문제의 제기가 그대로 진리일 수 있는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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