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도 불교를 이해하려 들다가 그것이 너무 난해함을 탓하는 수가 많다. 그리고 그 난해한 이유는 대개 엄청난 술어 때문이라고 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정각 이후의 붓다에게는 아직 한 개의 술어도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연기'라는 술어 마저도 틀림없이 후일에 성립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난해하다고 한 것은 결국 그것이 추상적인 원리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도인들이 추상적인 사고를 즐기던 민족임은 문헌을 통해서 잘 알수 있으나 아직 붓다 시대에는 추상적 사색이 발달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몇몇 사상가들이나 그들을 따르는 사람 중에는 충분히 그것을 감당해 내는 이도 있기는 하였으나, 여느 사람들에게까지 그것을 바란다는 것은 무리였다. 이 연기의 원리는 아주 추상적인 원리인 까닭에 도저히 여느사람들의 이해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겠다. "적연미묘"하다든지 " 사람들의 생각을 초월한 것"이라든지, 또는 "지혜로운 사람만이 능히 알 수 있다."든지 한 것은 이런 사실을 가르키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먼 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추상적인 사색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이 첫째 이유가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좋을 줄 안다.
그 둘째 이유로서는 세상 사람들의 생활태도가 지적되어 있다. 사람이란 흔히 그 도리가 진리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받아 들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같은 경의 다른 대목에서 "이는 세상의 조류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붓다가 말씀한 것도 이런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진다. 뒤에서 밝혀지겠지만 이 연기의 원리가 요구하는 실천이란 욕심을 떠나는 문제, 즉 고의 멸진을 실행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이 욕망에 빠져 있을 때에는 아무리 연기의 도리를 설해 보았자 도저히 그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없다고 하여야 될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오직 기진 맥진할 따름이니라."는 이유가 붓다로 하여금 설법을 주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는 현대에 사는 우리라 해서 조금도 고대인 보다 나아진 것은 없을 터이다. 우리 또한 욕망을 즐기고, 욕망에 빠지고, 욕망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그대로 지녀서 아무리 불교를 알려고 애쓴다 하더라도 결국은 인연없는 중생이 되고 말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야하면 실천 없는 불교란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나는 짐짓 연기 사상의 난해함을 강조하고 있는 듯이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하기야 붓다도 그리고 후세의 불교인들도 자주 그것이 난해함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내가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은 이미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을 알리기 위해 나는 붓다가 열거한 난해한 이유를 나누어 설명했던 것이다. 그 첫째 이유, 즉 심심미묘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사고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이미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아도 된다. 문제는 오히려 둘째이유에 있다.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느냐 하는 점이다.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다. 도리어 잘 알겠으나 자신은 그것에 의해 살아갈 뜻이 없다고 한다면, 결국 불교와는 인연이 끊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그 실마리가 될까해서 나는 이 장의 첫머리에 '연기의 공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몇 구절을 인용해 놓았다. 그것은 붓다가 정각한 직후 아직도 보리수 밑에서 명상하고 있을때에 정리해 둔 것이다. 사실을 말한다면 나도 역시 붓다가 정각을 성취한 그 순간의 소식에서부터 해명해 가고 싶지만 그것은 누구의 손으로도 불가능할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마치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은 그 순간 같은 것이어서 그때의 내적 체험의 경위는 아마 본인으로서도 밝힐 수가 없었으리라 믿어진다. 따라서 경전에도 그 순간의 내적 체험을 이야기한 붓다의 말씀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그런 체험에 입각하여 정리해 놓은 사상체계를 통해서 어느 정도 그것을 짐작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겠다.
그런 뜻에서 우선 이 '연기의 공식'을 취택한 것이고 이것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이것이 있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지것이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는 부분이다. 붓다는 일체 존재의 발생을 이 공식으로써 풀어 간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테면 그 보리수 밑에 있었을 때, 붓다는 자기의 과제와 대결하면서
"무슨 까닭에 老死가 있는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노사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했다고 한다.([상응부경전]12:10). 이미 이런 사고 방식이 연기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려니와 여기에서는 존재의 발생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니 "말미암아(緣)생긴다."는 말을 줄여서 "연생(緣生)의 공식"이라 해도 좋을 줄로 생각한다.
또 하나의 부분은 그 후반의 것으로 다음과 같은 말로 되어 있다.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노사가 멸한다."
붓다 자신이 이 공식을 사용한 보기를 살피건대, 역시 보리수 밑의 명상에서
"무엇 없는 까닭에 老死가 없는가? 무엇이 멸함으로 말미암아 노사가 멸하는가?"
를 생각했다고 한다. 이것 또한 연기설에 의한 사고법이며, 여기서도 "말미암아(緣) 멸한다."는 말을 줄여서 '연멸(緣滅)의 공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으로 안다. 이리하여 이 전반과 후반을 합친다면 '연생,연멸의 공식'이겠으나, 그것을 다시 줄여서 나는 '연기의 공식'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연기의 공식이란 결국 이런 공식에 의해 모든 존재의 발생과 소멸을 생각해 가는 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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