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명백하게 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것 같은 '악마 상응'의 스물 넷째 경(經)인 '칠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것 또한 얼마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여전히 보리수 아래서 명상하고 있던 붓다에게 갑자기 악마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사, 안온(安穩)에 이르는 길을
네가 진정 깨달았다면
그 길을 너 홀로 감이 좋도다.
어이 남에게까지 설하려 하는가.
그것은 틀림없이 정각 직 후, 설법 여부를 문제 삼고 있을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 문제에 대해 붓다의 마음은 한때 부정적으로 기울었다. 왜냐 하면 붓다는 그것에 대해 여러 가지 위구와 불안을 느낀 까닭이다. 이런 부정적 일면을 문학적으로 나타낸 것이 이 악마의 이야기인 것이며, 그런 주저를 극복하고 마침내 설법을 결심하게 된 과정을 묘사한 것은 앞에 든 '범천 권청'의 이야기인 것이다. 즉 붓다의 심리적 움직임이 두 측면에서 묘사됨으로써 하나는 악마이야기가 되고, 하나는 범천의 이야기가 되고 있으니, 그것들은 매우 흥미 있는 고대 문학의 표현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악마이야기는 붓다가 최초 설법에 성공하고 마침내 60명에 이르는 제자들을 전도여행에 떠나 보낼 때 다시 나타나게 된다. 그들을 보냄에 즈음하여 붓다는 "비구들아, 자,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라고 격려한 끝에 여러 가지 주의를 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붓다의 '전도선언'이라고 부른다. 그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상세히 언급한 바 있거니와 그 '전도선언'이 있은 직후, 마라(악마)의 소리는 다시 붓다에게 속삭였다. [상응부 경전]4:5 '계제(係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우스워라, 그대는 이 세상에서
악한 이의 올가미에 걸리고
그대는 악마의 사슬에 매였나니
사문이여, 그대는 자유를 잃었노라.
이에 붓다도 게를 설하여 대답했다.
나는 진정 이 세상에서
악한이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도다.
나는 악마의 사슬을 풀어 버렸거니
파괴자여, 그대는 패하였도다.
생각건대 이제 설법을 결심했다는 것은 다시 또 자기 생애에 중대한 의무를 부과했다는 것이된다. 모든 구속에서 가까스로 해탈한 지금 그것은 또 하나의 속박이 되지 않으랴. 이런 새로운 불안이 붓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이악마 이야기는 이런 불안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대승불교가 전하는 악마이야기(붓다와 관계되는)와 아함부에 나타나는 악마 이야기는 그 시기 설정이 매우 다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대승에서는 그것을 모두 붓다의 성도 이전의 일이라고 기록했으며, 정각 이후의 붓다는 완전히 악마의 시련으로 부터 벗어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즉 붓다의 인간성이 아함부의 여러 경전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붓다가 이미 인간 보다 훨씬 높은 절대자로 인식되어, 그 인간성은 아주 희박해진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기에 정각 이후의 붓다와 악마를 관련 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함부에 보이는 악마이야기는 주로 정각 이후의 붓다에 관련되어 있다. 앞에 든 세개의 설화가 다 그렇거니와 그 밖의 것들도 예외가 거의 없다. 하기야 정각 이전의 붓다에게야 말로 더 많은 심중의 불안과 고민이 있었을 터이고, 따라서 악마 이야기의 형식으로 표현해야 될 많은 소재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아함부의 여러 경전들은 주로 정각 이후의 언행과 사상에 촛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함부의 이런 이야기는 바로 붓다 그 분의 풍부한 인간성의 표현이 되므로, 우리에게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이런 악마 이야기를 통해서 보면 붓다도 때로는 식욕의유혹을 받기도 했고 어떤 때는 수면의 유혹과도 싸워야 했던 모양이다. 다쳐서 누워있을 당시에는 -붓다의 만년에 데바닷다가 반역했을 때- 무엇인가 불안을 느낀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또는 여러 사람들을 상대로 법을 설하다가 ,갑자기 이래서 될까 하는 불안을 느낀 적도 여러 번 있었던 모양이다. '악마 상응'의14'직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에는 이런 이야기가있다.
이렇게 나는 들었다. 어느 시절 세존께서는 코살라국 에카사라
라는 바라문 마을에 계셨다. 거기서도 역시 세존께서는 많은
재가 신도들을 상대로 법을 설하셨다. 그때 악한 이 마라는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사문 고타마는 대중에게 에워 싸여 설법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어디 내가 가서 여러 사람을 속여줄까?"
그래서 악한 이 마라는 세존 앞에 나타나 게를 가지고 망을 걸었다.
"다른 사람에게 법을 설함은
현명한 그대의 할 일이 아니니
그대여, 그 짓을 굳이 하여서
탐심과 노여움에 매이지 말라."
세존은 그것에 대답하였다.
"남의 이익과 동정을 위해
깨달은 사람은 가르치나니
탐심과 노여움을 여래는 진정
이미 모두 해탈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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