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세 번째는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직역하여 "來見的"이라고도 하거니와, 그 뜻하는 바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 더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열려있는 진리'라는 정도의 뜻이다. '열려있는 진리'에 대립하는 것은 '닫혀있는 진리'이다. 세상에는 이미 그것을 믿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종교도 많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담의 신화를 믿는 이가 아니면 원죄 사상은 이해되지 않을 것이며 무량수경에서 보이는 법장비구(아미타불이 보살행을 닦을 때의 이름. 그는 이 때 48대 서원을 세워 수도한 결과 서방극락정토를 건설하여 그 부처가 되었다고 함)의 서원을 믿지 않는다면 염불 왕생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열려있는 진리'이므로 합리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생각컨대 붓다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또 누구라도 실천함으로써 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내용이었다. 결코 계시에 의지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든지, 신앙의 힘에 매달리지 않으면 얻어질 수 없다든지, 또는 이방인에게 베풀 수 없다든지 하는 그런 제한은 없었다. 허심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귀를 기울인다면 누구에게나 이해되는 내용이었으며, 편견을 떠나 눈을 들어 본다면 있는 그대로 인식되는 가르침이었다. 그러기에 "와서 보라"고 이를수 있는 것이며, 만인 앞에 '열려 있는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네 번째에는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더 원문 대로 번역한다면 다만 '잘인도하는 것'이 되지만, 어디에 인도하는 것이냐 할 때 열반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열반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붓다가 설정한 궁극의 목표요, 인간의 이상인 까닭이다. 인간은 대체 무엇이고자 원하고 있을까? 또는 무엇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저마다 생각이 있을터이므로 그 생각하는 내용도 각기 다양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현세에서의 번영을 이상으로 그리며 산다. 어떤 사람은 내세에 위안을 찾으려고 들기도 한다. 상천(上天)이니 왕생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제 붓다가 가르키는 목표는 '열반'이라고 표현된다. 그것은 닙바나(nibbana-팔리어) 또는 니르바나(nirvana-산스크리트어)
의음사인바 , 마은 속에서 타고 있는 격정의 불꽃이 꺼진 상태를 뜻한다. 이말로 붓다는 마음속에 어지로움이 없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경지를 가리킴으로써, 그것을 인간의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잘인도하는 것'이라는 구절은 붓다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인도하여 이런 이상을 실현시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생각건대 만일 붓다가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라는 것이, 다른 종교가들이 흔히 그러하듯 내세의 복지에 관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도저히"현실적으로 증험되는 것"이라거나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라거나 또는 "와서 보라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터이다. 불교의 긴 흐름을 돌이켜 볼 때 그런 내세설이 주장된 일도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붓다의 사상에는 그런 요소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나는 목소리를 높여 확언하고 싶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지적된 것은 "지혜있는 사람이면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자각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붓다와 우파바나의 문답에서도 나타나듯이 스스로 내심의 동향을 살펴 본다면 내 마음에 번뇌가 있다. 또는 내 마음에 번뇌가 없다고 자각할 수 있는 문제이다. 또 내재하는 방해물이 나타나서 마음을 교란시킨다면 고요히 반성함으로써 그 상황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또 붓다가 가르치 방법에 따라 그 방해물을 없앤다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구나 자각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적어도 붓다의 제자들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던 사람들이었다. "지혜있는 사람이면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은 붓다의 가르침이 이런 것이었음을 나타낸다. 만약 종교의 내용을 분류하여 자각의 길과 구제의 길로 나눈다면 말할 것도 없이 붓다의 가르침은 자각의 길에 속하며 그 가장 전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내재하는 방해물
"대덕이시여, 흔히들 '악마,악마'합니다만, 악마란 무엇입니까?"
"라다여, 만약 색(색)이 있다면 그것이 악마요,방해물이요,교란하
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다녀, 색을 악마라 관(觀;깊이 있게 보는것)하
고, 방해물이라 과하고, 교란하는 것이라 관하고, 병이라 관하고, 가시
라 관하고, 고통이라 관하라, 그렇게 관하는 것이 바른 관찰이니라.
라다여, 만약 수(受)가 있다면 그것이 악마요, 방해자요, 교란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다여, 수를 악마라 관라고, 교란하는 것이라 관하고, 병이라 관
하고, 가시라 관하고, 고통이라 관하라. 그렇게 관하는 것이 바른 관찰이니라."
([상응부경전] 23:1 魔 ,한역동본 ,[잡아함경] 6:10 魔 )
전장에서도 비슷한 문답형식의 일절을 인용했다. 우파바나라는 제자가 '현생적인 법'에 대해 물었고, 붓다는 여러 보기를 들어가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여기서도 라다라는 제자가 비슷한 형식의 질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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