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제자는 매우 솔직한 젊은이였던 것 같아서 어떤 기본적인 뻔한 사실에 대해서도 자기가 납득할 수 없는 경우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어김없이 물은 듯 보인다. 이를테면 흔히들 '무상' '무상'하지만 무상이란 대체 무엇인가하고 묻기도 했다. 또 흔히 '苦'를 말하지만 고란 무엇이라든지 '무아' '무아'라고 하는 그 무아가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 식이었다. 그런 문답이 [상응부경전]속에서는 한 곳에 모아져 ' 라다 상응(相應)'이라는 일련의 경군을 이루고 있거니와, 그것은 우리에게 더 없이 소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이 솔직한 젊은이는 무릇 불교의 개념적인 개념에 대해 샅샅이 묻고 있을 뿐 아니라, 붓다는 붓다대로 매우 명쾌한 답변을 하고 있으므로 ,오늘 우리가 붓다는 대체 어떤 뜻으로 무상이니,기, 무아니 하는 말을 썼는가를 알아보려고 할 때 이 '라다 상응'의 경이야말로 가장 명쾌한 대답을 제공해 주는 까닭이다. 나 역시 무엇인가 불교의 기본적인 개념에 의문이 생겼을 경우에는 언제나 이 경전을 들추어 보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부분은 그런 라다와 붓다의 문답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라다가 물은 것은 악마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문제이다. 그런 질문 자체가 이미 악마를 객체적인 존재로 보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아니나 다를까 붓다는 이른바 색,수,상,행,식의 작용이야말로 악마의 정체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잘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붓다는 인간을 관찰하고 인간을 논할 때면 먼저 인간을 다섯 부분으로 분석하였다. 오온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오온은 매우 어려운 말이거니와 결국은 다섯 부분이라는 뜻이다. 그리거 그 다섯 부분이 바로 앞에 열거한 색 수 상 행 식이다. 이제 그 다섯 부분에 대해서 대강 설명을 한다면 색이라는 것은 인간의 육체 , 즉 물리적인 요소를 가르키고, 수 이하의 네 가지는 그 정신적인 요소를 가르킨다. 즉 수는 감각이요, 상은 표상(表象)이요, 행은 의지요, 식은 판단 이성의 작용이다. 결국 붓다는 이 다섯개의 개념이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정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고, 이제 라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악마란 그런 요소들이 작용해서 생기는 내제적인 방해물이요, 내제적인 교란자요, 내제적인 불안이요, 내제적인 가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 놓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없지 않다. 많은 고대 문헌에 자주 악마가 나오지만, 그런 경우 대게 악마를 비인간적인 존재로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불교 문헌에서 조차 후대의 것은 역시 그런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붓다와 그 제자들에게는 악마란 필경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였다. 결국 악마라는 낡은 개념을 빌려 인간의 내적 방해물이나 불안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주의해 두어야 할 일로 생각된다.
또 다른 보기를 들어 보자면 [상응부경전] 22:63 '취(取)'라는 제목의 경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와 있다.
"색(色)에 집착할 때는 악마에게 붙잡힌다. 집착하지 않는다면 악마로부터 풀려난다."
그리고 여기서도 또한 수,상,행,식의 넷에 대해서도 같은 표현을 하고 있거니와, 그 말투로 보아 인간 밖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악마가 아니라 ,인간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나쁜 생각을 가리킨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깨닫게 된 다음부터 나는 이제껏 별로 주의하지 않았던 아함부의 여러 경에 산재해 있는 악마 이야기를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읽어 갔다. 읽어 감에 따라 그것들이 실로 중대한 뜻을 지닌 문헌임을 알게 되어, 지금까지 모르고 지냈던 일을 뉘우치기조차 하였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 속에는 붓다와 그 제자들의 진면목을 엿 볼 수있는 몇 가지의 중요한 실마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상응부경전]4 '악마 상응'이라고 불리는 악마 이야기를 다룬 스물 다섯가지의 경을 수록하고 있거니와, 그 첫째 경인 '고업(苦業)'이라는 부분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그것은 붓다가 정각을 성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아직도 네란자 강 기슭의 어떤 보리수 밑에서 명상에 잠겨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붓다는 마음 속으로 먼저 자기가 고행을 포기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순간 마라(악마)는 붓다의 심중을 눈치 채고 게(偈)를 가지고 도전해 왔다.
고행을 떠나지 않아야만이 사람의 마음은 청정해짐을 ,그대는 이것을 버린 주제에 청정한 양 자처함 우습구나야.
붓다는 그것이 마라의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도 또한 게를 가지고 대답했다.
불사(不死)위해 고통을 닦은 나머지 전혀 이익 없음을 깨달았노라.
육지에 놓여진 삿대와 같아 오직 무익한 줄을 마땅히 알라.
그러자 악마는 "세존은 나를 알고 있다. 내 정체를 간파하고 있다."고 외치면서 허둥지둥 그림자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체 경전 편집자들은 이런 데에 왜 이런 이야기를 적어 놓았던 것일까? 생각건대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고행의 포기는 붓다로서도 매우 곤란하고 중대한 행위였음에 틀림없다. 정각 직후에 그가 아직도 그것에 대해 얼마쯤 불안을 느끼는 순간이었다고 해서 ,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는 줄로 안다. 그런 내심의 불안이 악마 이야기의 형식으로 여기에 표현되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아무 무리도 없는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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