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이 이처럼 큰 것은 8장에도 나타나듯이 부처님 세존들도 이로부터 생겨났다고 하기때문이다. 14-3은 불세존들께서는 일체의 산냐를 멀리 여읜 자들(이일체상 즉명제불)이라고 설하고 있다. 산냐가 산냐 아님을 알아서 거기에 얽매이지 않을 때 무상(無上)의 깨달음은 가능하며 그런 분들이야말로 부처님들이라는 말이다. 산냐를 여의라는 이 금강경의 말씀 때문에 제불세존들이 부처님이 되셨기 때문에 이 금강경의 공덕은 한량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도 모든 부처님이 산냐를 극복하라는 이 경에서 생겨났다고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거듭 강조하거니와 불교가 불교이고 부처님이 부처님인 것은 바로 이 산냐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인도 중원에서 당대에 최고의 경지라고 인정되던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까지 증득하시고도 이를 구경(究竟)이 아니라고 버리신 이유가 이들 경지는 아직 산냐에 걸려 있는 경지라고 지혜로써 간파하셨기 때문이다.
거듭 주장하지만 삼매=선정=사마타는 개념(빤냣띠=산냐)를 집중의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아무리 그 경지가 심심미묘하다 하더라도 미세한 개념(산냐)에 걸려 있는 것이어서 깨달음이 아니다. 부처님이 비상비비상처까지버리신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6년간의 엄청난 고행을 하시는데 발제자는 그 고행을 하셨던 이유를 그런 엄청난 고행을 통해서 산냐를 극복해보려고 하신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고행은 육체에 피로를 더할 뿐이고 마음을 혐오심 등에 머물게 할 뿐 결코 산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아시고 이것까지 버리시고 이제 당신 스스로의 길을 가신 것이다. 그래서 마음챙김(sati)을 확립하셔서 초선에서 4선까지 새로운 선(禪)을 체험하시고 제4선에서 우뻬카사띠빠리숫디(upekkha-sati-pārisuddhi, 捨念淸淨, 평온과 마음챙김의 완전한 청정)가 되어서 이 힘으로 번뇌를 멸절하고 구경의 깨달음을, 저 고귀한 해탈열반을 성취하신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이니 그 독송의 공덕이 한없이 크다는 것이다.
위 인용에서 보았듯이 금강경은 금강경의 공덕이 많음을 다 설하면 중생은 미쳐버린다고 하지 않은가! 세상에 어떤 경문이 이보다 더 공덕의 수승함을 묘사한 구절이 있을까? 그러나 참으로 금강경을 수지독송만하는 것으로 공덕을 쌓게 될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아인중생수자로 대표되는 산냐를 척파하라는 부처님의 고구정녕한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하고 지혜로운 주의(여리작의)를 기울여서 실제로 산냐를 극복해낼 때 이와 같은 불가설불가설전의 무량공덕이 있다고 봐야한다. 실제로 산냐를 극복하지는 못한다하더라 적어도 부처님께서 고구정녕히 설하신 아인중생수자상을 없애라는 메시지 정도는 바르게 이해해야 그 공덕이 수승하다고 본다. 수지독송만해도 그 공덕이 무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 구마라즙이 “[마음에] 간직하고 독송하고 이해하고 근원적으로 마음에 잡도리하고[如理作意] 남에게 자세히 설명해준다면”하는 구절을 전체 금강경에서 受持讀誦만으로 축약해서 옮겼기 때문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현장은 모두 受持讀誦究竟通利 及廣爲他宣說開示如理作意로 옮겼다.(아래 3번 쟁점의 문맥설명을 참조할 것)
자아가 있다, 우리 마음은 영원히 생사를 초월해있다, 생멸하는 현상계 배후에는 불생불멸의 진여자성이 있다라는 이런 산냐를 극복하라는 것이 금강경의 근본 가르침이라고 이해해야 그 공덕이 실로 어마어마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공덕이 없다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엄청난 대사자후를 토하시는 경을 뜻은 모르더라도 독송하는 것만으로도 공덕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축자영감설과 다를 바가 없다 하겠다. 너희가 하면 축자영감설의 맹신자요 우리가 하면 무량공덕이라 한다면 억지스럽지 않은가.
이렇게 산냐를 극복할 것을 설한 이 경의 수승함을 금강경은 후반부로 오면서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 이런 것을 강조하다 보니 산냐의 극복이라는 본뜻은 멀어지고 그냥 경을 독송하여 복덕을 모으는 데만 빠져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현금(現今)의 한국불교에서의 금강경의 위치가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소승이든 대승이든 후대불교 경전이나 논서들은 모두가 이념서적으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한 셈인데 이런 의미에서 금강경의 이런 무량공덕에 대한 말씀은 신행생활을 관념화하고 이념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하겠다.
아무튼 16-3에서는 “‘공덕의 무더기, 공덕의 무더기’라는 것, 그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라고 여래는 설하였나니 그래서 말하기를 공덕의 무더기라 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일 공덕의 무더기가 [실제로] 있다고 한다면 여래는 ‘공덕의 무더기, 공덕의 무더기’라고 설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설하시고 28에서는 “참으로 다시 수보리여, 보살 마하살은 공덕의 무더기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설하신다. 뜻은 모르고 독송만해도 공덕이 무량하든, 금강경의 근본 입장을 이해해야 공덕이 무량하든, 실제로 산냐를 척파해야 무량공덕이 되든 부처님께서는 경 전체에서 공덕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고 계신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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