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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회 공덕 즉비공덕

금강경/금강경결제발제문-초불연

by 자수향 2009. 3. 21.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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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께서 공덕의 무더기라고 설하신 것, 그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나니 그래서 여래께서는 설하시기를 ‘공덕의 무더기, 공덕의 무더기’라 하시는 것입니다:

산냐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이런 논법을 본 경에서는 채용하고 있다. 이런 논법이 아니면 아산냐(asaññā, 산냐 아님)에 집착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또 다른 산냐가 되고 말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이 6월 12일 월요일이라 한다. 그러나 오늘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하나의 약속(vyavahāra, Pāli. vohāra, 30-2장 3번 주해 참조)으로서 그레고리력을 지금 세계가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력으로 따지면 오늘은 5월 10일이다. 그래서 오늘을 6월 12일 월요일이라고 단정지을 불변의 법칙이나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을 6월 12일이 아니라고만 주장하는 것도 현실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6월 12일까지 백 억을 지불해야 하는 회사 사장이 오늘은 6월 12일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 해서 지불하기를 거절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래서 6월 12일은 vyavahāra(약속, 俗諦)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6월 12일은 6월 12일이라고 할 정해진 불변의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6월 12일이라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6월 12일인 것이다. 이런 위아와하라에 기초해서 인간 세상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행위는 오차 없이 진행되어 가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관찰하는 것은 중국의 영가 현각 스님의 영가집에서 설하고 있는 쌍차쌍조(雙遮雙照), 나아가서 차조동시(遮照同時)의 가르침과 견주어 볼 만하다 하겠다.

한편 이것은 전통적으로 空假中의 삼관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거듭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본 경은 산냐를 극복하는 것을 설하였지 산냐 없음에 몰두하는 것을 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발제자는 이런 금강경의 말씀을 공(空, śūnya)이라는 거창한 명제로써 설명하는 대승불교적인 관점을 너무나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이라 간주한다. 금강경은 공을 설하신 게 아니고 초기불교에서 부처님께서 고구정녕히 설하신 ‘산냐를 극복하라(sa~n~nānam uparodhana)’는 말씀을 따르는 경이라고 받아들인다. 공관의 지혜를 설하기에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산냐를 뛰어넘는 참 지혜를 설하기에 반야바라밀이요, 본 경 14-4장에서 설하는바 최고의(parama) 바라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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