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그 공덕이 정말 수승한가?
먼저 공덕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공덕은 산스끄리뜨 pun*ya(빠알리 pu~n~na)의 번역어이다. 사전에서는 ‘천상에 태어나거나 미래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토대나 조건’, 혹은 ‘좋은 일을 행한 덕으로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능력’으로 설명한다. 전통적으로 공덕은 세 가지에 의해서 쌓인다고 한다. 그것은 보시(daana), 지계(siila), 수행(bhaavanaa=자기개발)이다. 그래서 본 경에서도 공덕은 항상 보시와 지계(유지계수복자)와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 공덕은 본경에서 항상 쌓는다(prasunoti)는 동사와 함께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다. 공덕은 누가 주는 것이 아나고 스스로 보시 지계 자기개발로 쌓아나가는 것이다. 구경의 해탈에는 이르지 못한다할지라도 이 세 가지를 쌓음으로써 미래의 행복을 닦을 것을 특히 재가불자들의 신행의 중요한 덕목으로 초기불교부터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셨다. 그리고 초기경에서는 이런 공덕을 닦는 복밭(福田, pun*ya-ksetra)으로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의 사쌍팔배를 들고 있다. 이런 승가를 우리는 복전승이라 부른다. 승가는 세간의 복밭이 될 때 공양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니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불제자들의 신행의 출발은 이런 복을 닦는 행위 즉 보시와 지계에서부터 출발되어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승불교의 핵심인 육바라밀의 출발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가 최상승을 표방하는 금강경의 산냐의 척파를 논의하는 것은 이런 보시와 지계와 자기개발의 탄탄한 기초위해서 행해져야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상누각이 되고 말 것은 자명하다하겠다.
본 경에서는 산냐를 초탈하라는 이 금강경의 구절을 수지독송하고 이해하고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이고 남에게 설해줄때 이를 法施(dhamma-daana)라고 하며 법구경 등의 초기경에서도 모든 보시가운데서 법보시가 최상이라고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 공덕이 저 물질적인 보시[財施]의 공덕보다도 어마어마하게 많음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럼 문맥을 따라 살펴보자.
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6장에서 이런 법문을 듣고 청정한 믿음을 내는 자는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쌓고 얻게 될 것이라고 부처님은 지혜로서 그들을 아시고 부처의 눈으로써 그들을 보신다고 금강경의 공덕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하신다.
이제 8장과 11장에서는 산냐를 극복하라는 이런 법문을 이해해서 남에게 설하는 공덕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우고서 여래 아라한 정등각들께 보시를 행하는 것보다 더 크다고 가르치신다.
다시 12장과 15-3장에서는 천 인 아수라를 포함한 세계가 이 금강경을 설하는 지방을 탑묘처럼 여길 것이라고 하신다.
13장에서는 매일 매일 강가 강의 모래알들과 같이 [많은] 몸들을 강가 강의 모래알들과 같은 겁들 동안 바친다 하더라도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설하는 공덕에는 까마득히 미치지 못한다고 하신다. 1
4-9에서는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쌓고 얻게 될 것이라고 모든 부처님들이 수지독송하는 자들을 다 알아보신다고 한다.
이제 비유는 그 강도가 엄청나게 세어진다.
15-1에서는 이 금강경 법문을 듣고 비방하지만 않아도 강가 강의 모래알들처럼 [많은] 몸들을 바치고 그와 같이 낮에도 강가 강의 모래알들처럼 [많은] 몸들을 바치고 저녁에도 강가 강의 모래알들처럼 [많은] 몸들을 바치며 이런 방법으로 수많은 백천만억 겁 동안 몸들을 바치는 것보다도 더 많은 공덕을 얻는다고 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하면, 참으로 확신이 부족한 중생들은 이 법문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며 자아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도 중생이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도 영혼이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도 개아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보살의 서원을 가지지 않은 중생들은 이 법문을 듣거나 배우거나 [마음에] 간직하거나 독송하거나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다시 16-1에서는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설명해주더라도 오히려 그들은 수모를 당하게 되고 아주 심한 모욕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들 중생들은 전생에서 지은 나쁜 업들로 악도에 떨어져야 하겠지만 현금(現今)에서 그런 모욕을 받음으로 해서 전생에 지은 나쁜 업들이 소멸되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증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한편 15-2장에서는 “최상승에 굳게 나아가는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고, 최고로 수승한 승[最殊勝乘]에 굳게 나아가는 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여래는 이런 법문을 설했다.”고 했고 참으로 확신이 부족한 중생들은 이 법문을 들을 수가 없으며 보살의 서원을 가지지 않은 중생들은 이 법문을 듣거나 배우거나 [마음에] 간직하거나 독송하거나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고서 다시 16-3에서는 내가 그 선남자나 선여인들이 그 때에 쌓고 얻게 될 그들의 공덕의 무더기를 모두 말한다면 중생들은 미치거나 마음이 광란하게 될 것이라고 하시면서 참으로 이 법문은 불가사의하다고 여래는 설하였지만 이 [법문의] 과보도 또한 불가사의하다고 기대해도 좋다고 공덕의 설명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저 인도 사상계를 보라. 무아를 설하고 자아라는 산냐를 가지지 말라고 가르치는 불교를 두고 2천 5백여 년간 광기에 어린 비방과 비난을 얼마나 많이 퍼부어 왔는가. 예를 들면 후대로 오면서 불교가 인도를 떠나게 되자 뿌라나(Purān*a) 문헌들에서 부처님은 그들 비슈누 신의 9번째 화신이라고 적당히 받아들여 찬사를 보내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말세인 깔리유가를 빨리 망하게 하고 정법시대를 빨리 실현시키기 위한 파멸의 가르침이니 받아들이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고 대다수의 인도인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참으로 마음이 광란한 소치이리라.
그들의 논지가 조금이라도 법답고 이치에 맞고 근거가 있는 소리라면 겸허하게 받아들여야겠지만 모두가 무상의 법칙이 너무나도 잘 적용이 되는 육근과 육경에 바탕한 세간적인 지식과 판단 위에서 불교는 허무를 말하는 종교라는 대중의 무지를 선동하여 퍼붓고 있는 비방이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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