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은 아마도 이상스런 질문을 한다고 여길지 모르나, 이런 데에도 현실을 직시해가는 붓다의 사상적 자세가 보인다. 물론 바차는 알 수 있다고하였다. 바차가 아니더라도 이런 대답 밖에는 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자 붓다의 이상한 질문은 다시 이어졌다.
"바차여, 그러면 불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것은 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옳은 말이다. 바차여, 그 불이 다 타고 꺼졌을 때, 그 불은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려는가?"
"대덕이시여, 그것은 적당한 물음이 아닙니다. 그 불은 나무가 있었으므로 탓던 것이요, 이제는 나무가 없어졌기에 꺼진 것입니다."
이 이상스런 문답으로 붓다는 열반을 설명해 갈 터전을 닦았던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순순히 이런 말씀으로 타일렀다.
"이 인생은 괴로움으로 차있다. 그리고 그것은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때문이다. 사람이 어리석어서 격정의 희롱하는 바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격정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 격정이 없어지고 보면 불안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것도 없어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훨훨 타오르던 불도
그 땔감이 다하고 나면 꺼져 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을 나는 열반
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듣고 난 바차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로부터 일생을 통해 충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어쨋든 여기에 전개된 문답은 불교의 이상인 열반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더욱이 거기에 사용된 비유는 단순한 비유로만은 보기 어려울 정도로 열반의 개념에 밀착되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대저 열반이란 그 원어 (Pali, nibbana; Skt.,nirvana)의 뜻을 캐어 볼 때 '불이 꺼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술어를 붓다는 어디로 부터 가져왔던 것일까? 이런 문제를 캐기란 쉽지 않지만, 요컨대 그 출처는 붓다의 사상 자체에 있었던 것이라고나 해야 될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이나 아주 초기에 속하는 붓다의 설법 중에 '연소'라는 제목으로 전해지는 경이 있다. 유럽의 불교 학자들은 이것을 예수의 '산상수훈설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붓다가 전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바라나시교외에 있는 이시파타나 미가다야로부터 다시 마가다국의 우루벨라-정각한 곳-로 돌아온 붓다는 거기서 많은 제자를 얻었다. 그 수효는 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 제자들을 이끄로 붓다는 다시 그나라의 수도인 라자가하로 떠났던 것이지만 그 출발에 즈음하여 그는 제자들과 함께 가야시사에 올라간 일이 있다. 산상에 올라서 바라보매, 추억 많은 땅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동북 쪽으로는 아득히 가야의 거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동쪽에서 흐르는 네란자라 강임에 틀림없었다. 다시 그것을 따라 멀리 남녘으로 눈을 옮기니 정각을 성취했던 고장이 보였다. 이 장한 조망을 발 아래 놓고 붓다는 새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타고 있느니라. 훨훨 타고 있느니라.
먼저 이 사실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뜻인가?
비구들이여, 눈이 타고 있다. 마음도 타고 있다. 모두 그
대상을 향해 훨훨 타오르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것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는 것이랴.
탐욕의 불꽃에 의해 타고, 노여움의 불꽃에 의해 타고,
어리석음의 불꽃에 의해 타고 있느니라."
그것은 붓다의 새로운 설명 방식이었다. 이제까지 붓다는 고조된 욕망을 말하는 데 '갈애'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찬가지로 욕망이 고조뒨 상태를 나타내면서 '연소'라는 말을 썼던 것이다. 그 새로운 용어는 불교의 흐름에 따라 오래도록 큰 영향을 미쳤다. 후세의 불교인들이 흔히 '욕망의 불꽃'이라 했을 때, 그것도 이 계열에서 생겨난 용어라고 보아야 하리라. 그리고 붓다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 비유적인 표현을 따라 이야기 한다면 결국 그 연소하는 욕망을 가라 앉혀야 한다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번뇌의 불꽃이 완전히 꺼질 때, 거기에 나타나는 시원하고 편안한 경지, 그것이 열반임에 틀림없다. 열반이라는 술어는 이런 인생의 현실에 대한 생각을 배경으로 하여, 이상의 경지를 뜻하는 말로서 생겨났던 것이리라.
열반이라는 말은 그 성립 과정에서 본다 해도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표현이다. 깊은 생각없이 이를 대하면 천국이니 극락이니 지복이니 하는 말에 비겨 매우 매력이 없는 말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후세의 불교인 중에는 이것을 소극 무위의 경지라고 잘못 생각한다든지, 회신 멸지(灰身滅智;육체적,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의 경계로 판단한다든지 하여 마침내는 열반으로써 죽음을 뜻하게까지 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당치 않은 해석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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