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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옮기기 37회(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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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불방일

 

 

    "비구들이여, 밤하늘에서 온갖 별들은 빛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달

     빛의16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기에 달빛은 밤하늘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여겨진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여러 길이 있건

     만, 그것들은 모두 불방일로 근본을 삼는다. 그러기에 온갖 착한 법

     중에서 불방일이 최대가 되고 최상이 되느니라.

     비구들이여, 또 가을 하늘에 한 점의 구름도 없을 때, 해는 하늘에 

     떠올라 일체의 어두움을 쓸어 버리고 눈부시게 시방(十方; 동서남북

     과 동북, 동남,서북,서남,상,하)에 빛을 던지지 않느냐? 그러기에이 세

     상에 여러가지 길이 있건만 그것들은 모두 불방일로 근본을삼는다. 그

     러므로 온갖 착한 법 중에서 불방일이 최대가 되고 최상이 되느니라."

 

                                                                                                    ([상응부경전] 45:146 月. 147 日)

 

불방일(appamada)이라는 말은 아직 우리말로서는 익숙해져 있지 못하다. 정진(viriya)이라고 하면 다 알지만, 그것과는 얼마쯤 뉘앙스가 다르다. 오래된 경전의 말씀에도 "방일하게 놀았거늘"이라는 표현이 있거니와, 자기를 잊고 자제함이 없이 온갖 욕망에 이끌려 가는 것, 그것이 방일이다. 그러므로 불방일이란 그런 상태에 빠지는 일이 없는 자제와 집중과 지속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붓다가 설하신 대로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이미 내심의 어지로움이 없는 자유롭고 편안한 경지에 이르는 것, 그것이 붓다의 가르침이요, 붓다가 수범하신 길이려니와 그것을 행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곧은 길 설하심을 듣자온 바엔

    그 길 가고 물러섬이 없어야 하리.

    제가 저를 나날이 채찍질하여

    궁극의 경지에 이를지로다.

 

제자들의 게(운문)을 모운 [잘로게경]에도 이런 노래가 보인다. 앞에도 나온 바 있는 '소나'라는 비구가 읊은 것이 이것이다. 그는 극단적인 수행을 감행하여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했으나 아무리 애써 보아도 실현되지 않아서 걱정과 의혹에 사로 잡혔다. 그 때 붓다가 거문고 줄의 비유로 그를 타일렀기에 그는 그 가르침에 의해 차츰 도를 즐길 수 있게 되어 마침내는 열반의 경계를 성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더 비참한 이야기는 [상응부경전](4:23 구저가, 한역동본, [잡아함경] 39;11 구저가)에 실려 있는 고티카의 경우리라. 그는 라자가하 근처에 있는 어느 바위굴에 있으면서 열심히 수행한 결과 몇 번인가 해탈의 심경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런 경지는 지속되지 못하고 그 때마다 원상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그런 일을 되풀이 하기 여섯번에 이르러 그는 마침내 칼을 들어 제 목숨을 끊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경의 서술은 참으로 비통한 기분에 넘쳐 있어서 오늘도 읽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에 족하다. 그러면 대체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퇴전해야 하는 것일까? [법구경]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뿌리만 안 상하여 든든하다면

     나무는 베어져도 다시 생기며,

     애욕을 뿌리째 끊지 않으면

     또 다시 되풀이해 고(苦)는 생기리.

 

나는 이제 고티카의 보기를 들었거니와 그런 극단적인 경우를 들어서 이 문제를 논한다는 것은 아마도 그리 적당한 일이 아닐 터이다. 극단으로 달려서는 사태를 도리어 그르친다는 것이 원래 불교의 입장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문제를 더 정상적인 경우로 되돌려 놓고 생각할 때 후세의 불교인들이 '아비발치(avaivartica)라고 이른 것이 그것이며, 또 '돈(頓)"이니 '점(漸)'이니 논한 것이 그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아비발치'라고 하면 처음 듣는 말이라고 하실 분도 많이 있으려니와, 이를테면 친란(親鸞)이 한번 믿음을 일으켜서 염불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 그 사람은 열반이 약속된 이로서 불퇴의 자리에 드는 것이라고 한 그것이 '아비발치'이다. 이것은 물론 범어의 음사요, 의역하면 '불퇴'또는 '불퇴전'이 된다. 불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여기까지오면 절대로 타락할 염려가 없다는 경지, 그것이 '아비발치'요, 불퇴의 자리요, 불퇴전지이다.

 

대체 그러면 사람은 어디까지 가야 다시는 전락의 가능성으로부터 모면되는 것일까? 후세의 불교인들은 이것을 놓고 저마다 논한 바 있었지만, 각설이 분분해서 하나의 정론이 나오지는 못했다. 이런 사실을 뒤집어 놓고 보면 불교인이 얼마다 얼마나 불퇴전의 경지를 열망하였던지를 알 수 있으며,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보아도 그런 경지란 발견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느 단계에 오르던 간에 고디카처럼 누구나 전락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야 할 것인가? 그 대답은 "그렇다"고 할 수 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 전락을 막는 오직 하나의 보장이 있으니 그것이 불방일이다. 그러기에 붓다는 자주 말하였다.

 

"비구들이여, 불방일한 비구라면 팔정도를 배워 익히고, 팔정도를

잘 닦아 갈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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