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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옮기기 4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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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 몇 세기의 그리스나 인도나 중국에 새로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을 찾는다면 그것이 바로 열쇠 노릇을 하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 국가 사이에 공통되는 새로운 현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도시 국가의 출현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이제 여기에서 고대의 도시국가, 이를테면 그리스인이 말하는 폴리스(polis)에 대해 자세히 논한다는 것은 이책의 주제에서 멀어지는 일이 될것이다. 그러므로 극히 간략한 언급 밖에는 시도할 겨를이 없거니와, 어쨋든 로마 ,아테네, 라자가하 또는 사바티 같은 곳의 구조나 생활을 생각해 볼 때 대략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도시들은 모두가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고 그 속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 시민들은 물론 동일 부족 만은 아니었다. 로마의 경우는 세 부족에 속하는 사람들이 한 곳에 살았고, 아테네로 말하면 네 부족이 모여서 그 폴리스를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런 생활 무대에서는 부족 중심의 생활 대신 시민 사회의 생활이 새로 등장하는 것이 필연적 추세였다. 이것은 역사가 자세히 말해 주고 있지만 여기에 이르러 혈연에서 말미암지 않은 인간의 정신적 결합이 비로서 인류의 역사에 크게 떠올랐던 것이라고 하겠다.

 

이제 눈을 돌려 붓다 시대의 인도를 자세히 살펴 볼 때, 그 사회 구조는 고대의 로마나 그리스와 아주 유사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서도 새로이 몇개의 고대 도시가 생겼는데, 그 중에서도 라자가하나 사바티 같은 곳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을 자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도시들이야말로 붓다가 주로 주로 활약한 무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붓다에게 귀의한 대부분의 신자도 이런 도시 사람들이 었다는 것이 쉽게 예상된다. 이런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생각해 보면 붓다가 '친한 벗'의 가치를 이상하리만큼 역설한 까닭이 조금씩 이해되는 것이다.

 

불교 내부에서도 혈연 아닌 인간과 인간의 결합이 큰 구실을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붓다의 교단이다.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붓다의 교단에서는 그 출신이나 혈통의 구별이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 한 경(『증지부경전』8:19 파하라다. 한역동본, 『증일아함경』 42 사수륜) 은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붓다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여러 강이 있어서 각기  강가. 야무나. 아치라바티. 사라부. 마히라라고 불리거니와,

그것들이 한 번 바다에 이르고 나면, 그 전의 이름은 없어지고 오직 대해라고만 일털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네 계급도 일단 법과 율을 따라 출가하고

나면 예전의 계급 대신 오직 사문이라고만 일컬어지느니라."

 

불교의 교단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 그들도 재가 시절에는 저마다 가문과 혈통이 있었을 것이지만 일단 붓다의 교단에 들어온 이상에는 사회적 신분 관계는 모두 불식되어 모든 사람이 평등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여러 강물이 바다에 일고 나면 오직 '바다'로만 불리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붓다의 교단에는 계급도 없고 통솔자도 없고 또 통솔 받는 사람도 없었다. 주목해야 될 것은 그 속에서는 붓다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가르침은 붓다에 의해 깨달아지고 붓다에 의해 설해진 것임에 틀림없다. 만약 붓다가 나타나서 정각을 성취하지 않고 법을 설하여 이 길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더러면  사람들은 마침내 이 법을 모르고 또한 이 길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길은 붓다 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 법(진리)은 태고부터 있었고 이 길은 영겁에 걸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발견하고 가르쳐 주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붓다 자신도 또한 이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의 하나이다.

그도 역시 서로 손을 잡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행의 한 사람인 것이다. 붓다는 이 사실을 명확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주 그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좋은 친구로 삼음으로써 늙어야 할 몸이면서도 늙음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 병들어야 할 몸이면서도 병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 죽어야 할 몸이면서도 죽음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 고뇌와 우수를 지닌 몸이면서도 고뇌와 우수로 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거기에는 삼가(samgha)라고 불리는 불교 교단의 기본적 성격이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 같다. 그것과 대조하기 위하여 이를테면 기독교 교단의 구조를 생각해 보자. 거기에는 우선 그 교도들이 은총을 구하고 구제를 기원해야 하는 전능한 신이 있으며 다음으로 그 신이 파견했다고 생각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교도들은 그런 절대적 권위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머리 숙이고 빌어야 할 어떤 대상도 없다. 거기에서는 모든 성원이 오직 법의 증지(證知)와 실천이라는 한 가닥의 길을 같은 방향으로 걸어 가고 있을 따름이다. 그 선두에는 붓다가 선구자의 자격으로 서 있어서 "너희들도 오라." 고 손 짓하고 있는 것 뿐이다. 이리하여 그 뒤를 따르고 스 수범에 힘입어 오직 자기 형성의 길을 걸어가는 것, 이것이 불교요 승가(僧伽)인 것이다.

 

이런 불교 교단의 성격을 곰곰이 생각할 때, 붓다가 '좋은 벗'의 소중함을 역설한 까닭이 차차 이해되어 오는 것처럼 여겨진다. 거기에는 은총을 드리울 신도 없고, 믿고 의지할 중개자도 없거니와 그 대신 손짓하여 부르는 붓다의 수범이 있고 힘이 되어 주는 좋은 벗의 큰 격려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붓다조차  좋은 벗의 하나라는 것을 명확히 이해할 때, 불교의 진정한 면목을 파악한 것이 되는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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