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셋째 명제인 열반 적정은 불교가 이상적인 경지라고 여기는 열반을 가리킨다. 이것을 목적론 또는 행복론이라고 하여도 되리라.
그런데 이 삼법인에는 붓다가 그처럼 역설했던 고(苦)에 대한 주장이 빠져있다. 즉 이 인생을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하는 소견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개고의 명제를 세워, 이것을 삼법인에 추가하면 사법인이 되는 것이다.
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의 개념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후대의 불교인들에 의해 다른 종교에 대한 불교의 특징을 해명하고자 해서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붓다 자신은 불교의 기본적인 성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 까? 추측하건대 그것은 다름아니라 앞의 문답에서 사용되었던 무상-고-무아의 계열이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이제까지 별로 지적하는 학자가 없었던 듯하지만 나는 목소리를 높여 이 사실에 대해 주위를 환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이 무상-고-무아의 계열에 앞에서 설명한 사제의 체계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이미 말한 바와같이 사제의 체계란 붓다가 그 가르침의 뼈대가 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자주 제자들에게 역설한 바 있는 가르침이다. 사실이 또 그러해서 이것을 알고 이것만 실천한다면, 붓다의 제자로서 뜻한 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그 밖의 것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번거롭게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방해가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제법은 어디까지나 실천의 체계이므로, 적어도 그 표면에는 붓다의 존재론이나 인간론은 나타나 있지 않음이 사실이다. 그것들은 그 체계의 밑바닥에 깔려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 체계로서가 아니라 사상의 체계로 나타낸다면 어떻게 되느냐가 문제가 되는 바, 그것이 무상-고-무아의 사상 계열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 제1항목은 존재에 대한 해석이요, 제2 항목은 인생을 해석한 결론이다. 그리고 셋째 것은 인간 해석에 대한 붓다의 주장을 표명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후세 불교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삼법인 또는 사법인의 주장은 이런 붓다의 사상을 고스란히 계승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붓다가 제자들을 상대로 문답한 이 내용은 불교의 기본적 성격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뜻을 가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붓다의 문답에 또 하나 재미있게 생각되는 것은 붓다가 이런 문답식을 자주 응용 문제의 형태로 비구들에게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어느 경([상응부경전]22:151 아}은 이런 문답을 전해 주고 있다.
"비구들아, 무엇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무엇에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 무엇을 탐함으로 말미암아 아견(내가 있다는 생각)은 일어나겠느냐?"
현명한 독자는 곧 이해하실 줄 믿거니와 이 질문은 무상-고-무아의 문답식을 거구로 하여 대답해야 될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 저 문답식에는 거침없이 대답하던 비구들도 이 응용문제에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못했던 것 같다. 이 밖에도 비슷한 질문의 보기가 몇가지 나와 있으나 거기서도 그들은 대답이 막혀 붓다의 가르침을 청하기도 하였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우리 법의 근본이시며, 우리 법의 안목이십니다.
원컨대 우리를 위하여 그를 설하시옵소서."
이것이 답변이 막힌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청할 때에 말하는 유형화된 표현이었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그 청에 따라 해답을 설해 주었다.
"비구들아, 색(물질)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색에 집착함으로 말미
암아 ,색을 탐함으로 말미암아 아견은 일어나느니라. 또 수(감각)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상(표상)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행(의지)이 있음
으로 말미암아, 식(의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에 집착하고
탐함으로 말미암아 아견은 일어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이렇게 설한 붓다는 다시 한 번 그 문답식으로 돌아가서 비구들에게 묻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면 비구들아, 너희는 어찌 생각하느냐? 색은 영원하겠느냐, 무상하겠느냐?"
"대덕이시여, 무상하나이다."
이리하여 앞에 인용한 것과 같은 문답식이 반복되어 갔다. 이 문답식이 되면 제자들은 막히는 일이 없이 아주 잘 대답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 이 무답식을 평소에 배워 익히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런 문답식 교육은 이 문제에만 한한 것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사제'같은 것에 대해서도 그들은 잘 외고 있어서 붓다가 물을 때에는 언제나 "이는 고이다.", "이는 고의 발생이다.", "이는 고의 멸진이다.",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이런 문답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별로 주목한 학자가 없는 듯하다. 주의해서 잘 읽어 보면 지혜의 스승으로서의 붓다의 진면목은 이런 곳에 도리어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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