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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옮기기40회(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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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점에서 붓다와 예수 그리스도는 재미있는 대조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예수는 별로 문답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신념으로써 지니고 있는 것을 그대로 상대에게 쏟아 놓아 "저것이냐 이것이야"의 선택을 사람들에게 바리세인과의 문답 같은 것도 전하고는 있으나, 그런 때에도 예수는 역시 의연한 자세로 자기의 소신 그대로를 가지고 대답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에 비하여 붓다는 매우 자주 문답을 통해 붓다는 차차 상대를 인도하여 스스로 어떤 결론에 이르게 하곤 하였다. 앞에 나왔던 문답의 경우르르 생각해 보자. 가령 바차라는 외도가 열반에 관해 빛나간 질문을 했을 때 ,붓다는 불을 비유로 들어 문답을 거듭하는 중에 어느덧 열반의 개념에까지 이끌여 들었던 것이다. 또 어떤 비구가 맹렬한 수도 생활을 계속하는데도 목적을 실현하지 못해서 비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붓다는 그를 찾아가서 거문고를 비유로 들어 문답을 시작했다. 재가 시절 거문고를 잘 뜯었다는 그 비구는 거문고와 관계되는 일에 대해 붓다가 묻는 것에 대답해 가다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중도의 이념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문답을 읽고 있노라면 나는 왜 그런지 소크라테스 생각이 들곤 한다.

 

하기야 붓다와 소크라테스를 나란히 세워 놓고 볼 때, 여러가지 면에서 아주 유사한 점이 발견되는 것 같다. 두 사람 다 믿는 사람이라고 하기 보다는 생각하는 사람이었음이 확실하다. 유럽의 사상가들은 흔히 소크라테스를 '인류의 스승'이라고 하지만 그런 칭호는 그대로 붓다에게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도 또한 가르치고 이해시키고 신념을 생기게 하고 또 실천을 하게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스승이었던 까닭에 소크라테스처럼 붓다도 그 제자를 가르치는 방법으로 자주 문답방식을 채택했던 것이다. 그런 문답에 대해 우리는 몇 가지 실례를 보았으므로 여기서는 약간 특수한 문답을 보기로 들어 놓았다. 이 장의 첫머리에 소개한 것이 그것이다.

 

이 문답의 상대는 앞서 거문고의 비유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소나이거니와, 붓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것은 그 한사람만은 아니었다. [상응부경전]이나 한역의 [잡아함경]을 조사해 보면 몇 십회에 걸쳐 같은 양식의 문답이 붓다와 제자들 사이에서 되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붓다는 같은 문답 양식을 자주 제자들에게 적응 시켰는데, 그럼으로써 일종의 교리문답이 성립되었던 것 같다.

 

그 문답식은 얼른 알 수 있는 바와같이  무상 - 고 - 무아 로 연결되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붓다는 어떤 때에는 설법에 곁들여 그 자리에 있는 비구에게 그것을 시험해 본 적도 있다. 또 어떤 때에는 이제부터 좌선하기 위해 산중으로 들어가는 비구에게 그런 질문을 하여 대답을 하게 한 일도 있다. 그 제재(題材)는 때로 오온(인간을 구성하는 다섯가지요소)이기도 했다. 즉 색(물질,육체) 수(감각) 상(표상) 행(의지)식(의식)에 관한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육처(감각기관)를 다루기도 했다. 즉, 눈,귀,코,혀,몸,마음과 그 대상에 관한 문제였다. 이런 것을 소재로 하여 이를테면 네 눈은 영원한 것이냐 무상한 것이냐라고 묻기도 했다.또 네 눈의 대상은 영원한 것이냐 무상한 것이냐고 따졌던 것이다. 또 앞에 인용한 문답과 같이 네 색(육체)은 영원한 것이야 무상한 것이냐라고 묻기도 했다. 그런 붓다의 질문에 대해 경이 전하는 한에서는 어느 비구나 거기에 알맞은 대답을 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물음에는 누구라도 그렇게밖에는 대답할 수 없기도 했겠지만, 이 무상-고-무아로 연결되는 사고 방식은 붓다의 가르침의 기본적인 성격이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고쳐 생각해 보면 붓다는 그 제자들이 이런 기본적인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는지 어떤질를 문답을 통해 끊임없이 시험해 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후세의 불교인들이 주장한 '삼법인'또는 '사법인' 이다. 법인이란 바른 법의 표라는 정도의 뜻이어서, 불교가 그 밖의 종교나 사상과는 다른 중요한 특징을 섭송(攝頌), 즉 짧은 운문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제 그것을 한역에 의해 표시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1)제행 무상(諸行無常)

2)제법 무아(諸法無我)

3)열반 적정(涅槃寂靜)

 

이것이 이른바 삼법인이다.

 

4)일체 개고(一切皆苦)

 

를 추가해서 사법인이라 일컫는 수도 있다. 후세에서 불교를 말하는 사람들은 불교의 사상적 성격을 설명하는 경우 흔히 이 삼법인이나 사법인을 들었다. 따라서 오늘날 불교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게 이에 대해 들은 바가 있을 터이며, 그렇게 유명해진 만큼 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으로 나타남 불교 파악은 아주 요령있는 것이라 할 만하다.

 

먼저 제행 무상이라 함은 불교가 내세우는 존재론이다. 물론 그 밑밭침이 된 것은 앞서서 설명한 연기의 법칙이다. 일체의 존재는 서로 어떤 의존 관계에 있으며, 그것들은 여러 조건의 결부에 의해 생겨았고, 그 조건이 없어지는 데 따라 소멸한다는 것이 연기설임바,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이 제행 무상이다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제법 무아란 불교가 주장하는 인간론으로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제 1명제인 무상관이다. 일체가 무상하다면 영원 불변하는 자아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제행 무상'의 존재론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 또는 무상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 이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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