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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회-善/不善

금강경/금강경결제발제문-초불연

by 자수향 2009. 4. 13.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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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不善(kusala/akusala)은 무엇인가?

[문맥]
23장 “무상정등각은 자아가 없고, 중생이 없고, 영혼이 없고 개아가 없기 때문에 평등하나니 그것은 모든 능숙한 법[善法]에 의해서 철저히 깨달아지는 것이다.”
[구마라즙]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로 修一切善法하면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현장]
一切善法無不現證. 一切善法無不妙覺

구마라즙과 현장이 공히 善法으로 옮긴 산스끄리뜨 원어는 kuśala(Pāli. kusala)이다.

kuśala(Pāli. kusala)는 불교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술어인데 특히 초기불교에서는kusala-dhamma(善法)로많이나타나며이kusala-mūla(善根)라고도 나타난다. 초기경에 의하면 꾸살라물라는 다름 아닌 불탐·부진·불치 즉 탐·진·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앞에서도(4장 5번 주해 참조) 언급했지만 복덕(福德)이나 공덕으로 옮기는 뿐냐(pun*ya)의 반대말인 빠빠(pāpa)는 악(惡)으로 번역되는데 이 꾸살라를 이처럼 악(惡)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선(善)으로 이해한다면 꾸살라가 가지는 깊은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많은 한글로 번역된 경들에서 꾸살라담마[善法]를 아무 생각 없이 착할 善자 선법이라고 간주하여 ‘착한 법’이라고 옮기고 있으니 정말 원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벗어나고 있다 하겠다. 그래서 여기서 선(善, 꾸살라)과 불선(不善, 아꾸살라)의 근본의미를 어원에 입각해서 음미해본다면 선·불선의 불교적인 근본의미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꾸살라(kusala, Sk. kuśala)라는 단어는 인도의 전통에서는 kusa +la로 분석하고 있는데 여기서 꾸사는 꾸사라는 풀을 의미한다. 그리고 √la는 ‘자르다, 베다(to cut)’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꾸살라는 꾸사풀을 꺾는 것을 뜻한다. 왜 선이 이 의미와 연결되어 있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더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꾸사풀은 우리 나라의 억새풀과 비슷하다 할 수 있는데 인도의 전통적 제사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풀이다. 그런데 이 풀이 아주 억세고 날카로워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잘못 꺾게 되면 손이 베이게 된다. 우리 어릴 때도 억새풀 꺾다가 손이 베인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 중요한 풀을 베려면 아주 마음을 기울여서 조심해서 꺾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선이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주의(yoniso manasikāra, 16-1장 1번, 2번 주해 참조)를 기울임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이 말이 유래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엄밀한 의미에서 선업과 불선업을 구분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예를 들면 칼을 들어서 사람 몸에 상처를 주는 행위 그 자체는 그냥 하나의 행위지만 여기에 작용하는 의도에 따라서 선·불선으로 나누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의사가 칼을 들고 환자의 배를 가르는 것은 살리기 위한 의도이니 선 혹은 선업이 될 것이고, 강도가 금품 탈취를 위해서 행인의 배를 그리 하는 것은 불선 혹은 불선업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선이다. 불선이다’라고 무엇을 세운다면 그것이야말로 극복되어야 할 산냐가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선 아니 선이라는 산냐를 위해서 목숨 바친다 운운하는 극단적인 사고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선, 선업(kamma), 선근(mūla), 선법(dham ma)과는 거리가 멀게 되고 만다.

굳이 선·불선의 기준을 초기경에서 찾자면 저 유명한 깔라라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탐·진·치가 증장하는 것은 불선이고 반대로 탐·진·치가 줄어들고 소멸되는 것은 선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 범부는 매순간 어떤 식으로든 의도를 하지 않고서 살 수는 없으니 항상 그 의도가 선이 되도록 노력해야겠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향상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선·불선을 판단하려면 그만큼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이 선불선을 판단해서 선은 증장시키고 불선은 없애려는 노력이 사정근(26장 7번 주해 참조)이요, 팔정도에서는 6번째인 정정진이다. 이런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서 바른 마음챙김은 확고하게 되고 바른 선정을 얻어 평온과 마음챙김이 지극히 청정해져서[捨念淸淨, 우뻬카사띠빠리숫디] 이 힘으로 저 번뇌를 멸절하여 완전히 해탈하고 해탈했다는 지견[解脫知見]을 증득하는 것이 초기경에 나타나는 부처님께서 고구정녕히 말씀하고 계신 해탈의 길이요 팔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선정=삼매의 기본 정의은 선한 마음이 한 끝으로 됨(kusalacitassa ekaggata)이다. 해로운 마음을 일으키면서 앉아서 수백년을 참선하고 집중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참선이 아니다.

그래서 본 23장에서도 “그 무상 정등각은 자아 없음, 중생 없음, 영혼 없음, 개아 없음으로 평등하나니 모든 선법(꾸살라 다르마)들로 철저하게 깨달아지는 것이다.” 라고 하여 꾸살라 다르마는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선·불선 - 꾸살라·아꾸살라 - 의 철저한 간택, 이런 노력을 통해서 위없는 깨달음은 성취되는 것이라고 대승 경전인 본 경도 힘주어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다. 한편 영어로는 꾸살라는 wholesomeness로 아꾸살라는 unwholesomeness로 옮겨져서 정착이 되고 있는데 아주 좋은 번역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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