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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회-性이란 무엇인가(불성과 아뜨만은 같은가 다른가) 2

금강경/금강경결제발제문-초불연

by 자수향 2009. 4. 13.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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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성을 설명하든 일단 성을 성질(svabhava)이 아닌 주와 객으로 양분되는 현상의 뒤에 놓여있는 주객을 초월한 ‘본질’ 이라고 이해한다면 이것은 인류 지성사가 전개되어 오면서 구축해온 개념으로 시대와 역사의 산물이라고 발제자는 본다.

그것을 존재의 원형을 이루는 영원불변한 실재라는 이데아(플라톤)라 하든, 경험을 초월한 선험적인 순수이성(칸트)이라하든 그 무엇이라 부르든, 서양에서도 사물이 존재하는 배후에 내재되어있는 ‘본질’에 대한 개념의 정의는 조금씩 다르지만 존재의 본질을 어떤 식으로든 설명하려 노력해왔다. 이런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을 서양에서는 철학이라 부른다. 그러나 철학의 관점이 바뀌고 역사가 흐르면서 실존주의 철학이 등장하면서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는 명제로 존재의 뒤편에 놓여있다고 하는 ‘근본원리’를 찾고 추구하기 보다는 존재=실존(바로 지금 여기서 전개되어가는 삶 그 자체)을 중시하는 것이 지금 철학의 중요한 흐름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부처님께서도 존재의 배후나 본질을 규명하기 보다는 ‘苦(dukkha)'라는 술어로 나타낸 현실 그 자체를 바로 지금 여기서 관찰할 것을 다그치고 계신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룽꺄뿟따에게 세상은 영원한가 아닌가 등의 형이상학적이고 본질론적인 질문의 무익함을 천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이니 불성이니 자성이니 하여 바로 지금여기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버린다면 그것은 관념(산냐)놀음이라서 고의 해결과는 동떨어져버린다고 본다.

중국사람들도 모르긴 해도 性을 이런 식으로 파악했다고 본다. 차별적인 이 현상계 배후에는 그 차별에 공통되는 보편이나 본질이나 본체가 있고 그것을 性이나 理로 불렀다.

이런 사고는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가 전개해온 사유의 중요한 양태라고 여겨진다. 아마 동서를 막론하고 철기를 개발하여 절대군주국가체제가 막강한 힘을 발휘할 때 그런 왕조체제의 통치이념으로 전체에 공통되고 보편되는 그 무엇이라는 개념을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동시에 이론제공을 한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특히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종교현상과 다양한 사상이 소용돌이치던 인도나 중국 철학자들에게는 이런 性이나 됨(-tva, -tā, 영어로 -ness)의 문제는 아주 중요한 철학적 명제가 되었던 것 같다.

대승불교에서도 특히 중국불교에서도 모든 부처님들이 부처일 수밖에 없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그 무엇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모든 부처님들이 부처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모든 부처님들에게는 부처됨(불성)혹은 여래의 곳간(여래장)이 있어 그것을 발현했기 때문이라고 설하게 되었다. 중생이 부처가 된다면 그 이유도 중생에게 본래 부처됨(불성)이 고유해있기 때문이라 주장하는 것이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불성사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대승열반경에서 불성은 진여요 연기요 중도라고 하는데 이런 주제어의 나열은 있지만 왜 본질을 긍정하는 표현인 불성이 본질을 거부하는 표현인 연기요 중도인지 구체적이고 납득할만한 설명은 발제자가 아직 과문한 탓인지 보지 못했다. 오히려 연기와 중도를 불성이라 불렀다면 불성이라는 표현으로 성의 대열에 동참하여 그 시대의 군주나 사회주도층이나 지식인들에게 우리 불교에도 이런 생사를 초월한 본래자리라는 것이 있소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겠다.

그런데 만일 A1, A2, ... An을 A라고 개념규정짓는 인식행위를 산냐라한다면 책1, 책2 ... 책n을 ‘책’이라 규정짓고 인간1, ... 인간n을 ‘인간’이라 규정짓고 부처1 ... 부처n을 부처라 규정짓는 그 배후에 책됨이나, 인간됨(=자아)이나, 부처됨(불성)을 상정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산냐 중의 산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들이 말하는 아뜨만은 산냐이지만 우리가 말하는 불성, 진여, 자성청정심은 산냐가 아니라고 한다면 억지스럽지 않는가?

물론 불성이 불교의 보편성과 평등성을 강조하는 술어이기는 하지만 너무 이런 본질론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술어에 천착하다보면 부처님의 메시지와는 어긋나버리고 아뜨만과 같은 개념으로 가버리고 만다고 본다.

그리고 발제자는 이런 본질론적인 발상을 하는 한 그것은 참불교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물심의 현상을 대하면서 그 물심의 현상의 배후로 인식을 가져가버리면 산냐놀음에 놀아나는 것이지 참해탈은 결코 아니라 해야할 것이다. 이것이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를 얻고서도 구경의 해탈이 아니라하고 부처님께서 버리고 떠나신 이유이다. 부처님의 간절하신 말씀은 바로 지금 여기(ditthe vā dhamme, 現法, 現今)이다. 바로 이 순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 그 자체를 바로 볼 것을 역설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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