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 특히 한국불교에서 이해하고 있고 강조하고 있는 불성사상은 과연 힌두제파에서 설하고 있는 아뜨만 사상과 같은가 다른가하는 점은 금강경 결제에서 논의 되어야할 중요한 주제이다. 금강경이 거듭 강조하여 설하고 있는 것이 무아상(아뜨마 산냐)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불교에서 이해하는 불성은 아뜨만과 전혀 다르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 발제자의 의구심이고 매결제때마다 이점을 거론해왔다. 그래서 오늘은 性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토론하고자 성이란 무엇인가를 논점으로 삼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발제자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대승에서 말하는 性이야말로 금강경에서 말하는 산냐(관념, 이념) 중의 산냐라고 보는 입장이고 이제 이런 性의 문제에서 자유로와질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깨달음․해탈․열반의 참의미가 드러난다고 보고 있다.
그럼 먼저 인도에서 性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간략히 살펴보자.
1. -tā, -tva, -ness, -됨
‘-taa’, 혹은 ‘-tva’는 인도 문법에서 보면 추상명사형 어미이고 영어의 ‘-ness’를 뜻하고 한글로 ‘됨’으로 옮길 수 있다. 그래서 go(소)에다 -tva를 붙여서 gotva는 ‘소됨’을 뜻한다. 그러나 이런 어법은 인도철학의 제파 특히 논리학에서 받아들여져서 현상계의 뒤에 놓여있는 본질을 뜻하는 개념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여러 책(book)들이 책인 소이는 ‘책됨(bookness?)’이 있기 때문인데 이 책됨은 보편타당한 것이며 본질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을 넘어선 영원한 것이고 절대신(브라흐만)이 창조한 것이라고 한다. 즉 책됨은 선험적으로 본래 존재하며 이것이 현실에서 드러난 것이 개별적인 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각각의 인간으로서 다른 존재이지만 그 모든 인간을 인간이라 부르는 것은 인간됨이 본래 존재하기 때문이고 이 인간됨이야말로 아뜨만이요 진아이며 이것은 불생불멸이고 영원한 것이고 그것이야 말로 브라흐만이라고 한다.
특히 행위자(kartr*)에 첨가되어 kartr*tva를 설정하는데 불교에서 행위자란 오온의 가합일뿐이지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자 그들은 행위자가 행위자인 것은 행위자됨(kartr*tva)이 있기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행위자됨이라는 본질이나 본체 혹은 본성이 있기 때문에 행위자는 행위자라는 실체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하므로 책 한 두 권이 없어져도 책됨이 있기 때문에 책은 존재하고 행위자가 늙거나 병들거나하면서 아무리 변화해가더라도 행위자됨은 선험적이고 항상하기 때문에 행위의 주체는 항상하다는 논리이고 이런 행위자됨은 절대자(브라흐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불교가 사라져버린 인도에서는 이런 ‘-됨, -tā, -tva, -ness'로서 그들의 모든 사상의 논리적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그 무엇이 존재의 배후에는 놓여있다는 것이다.
2. svabhava(自性, 性)
性을 나타내는 또 다른 산스끄리뜨어(특히 불교산스끄리뜨와 빠알리)는 sva-bhava인데 ‘자신(sva)에게 고유한 성질(bhava)’이란 뜻이다. 즉 탐욕의 성질, 화냄의 성질, 기쁨의 성질 등 어떤 현상(법)이 다른 현상과 구분되는 고유한 성질을 스와바와라한다. 중론에서도 이 svabhava를 자성이라 옮겼으며 후대로 가면서 불변의 본성이라는 의미로 이해된 듯하다. 그러나 이 스와바와는 존재의 배후에 있는 본질이라는 의미로는 쓰이지 않았다.
3. buddha-dhātu(불성), tathāgata-dhātu(여래성), tathāgata-garbha(여래장), tathāgata-gotra(여래성), buddha-vamśa(佛種)
성을 거론하면서 뺄 수 없는 것이 이러한 불성과 여래장 사상이고 이번 논점의 주요 대상이다. 불성이 붓다다뚜의 역어라는 것은 서장역 보성론이 발견되면서 부터였다. 여기서 ‘dhātu에는 因의 의미가 있으며 미혹의 세계를 佛의 세계로 만드는 動人으로서의 힘이 불성이나 여래장에 갖춰져있기 때문’이라고 平川彰 교수는 인도불교의 역사에서 설명한다. 평천창의 설명처럼 불성과 여래장은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여래장경전으로서는 여래장경, 부증불감경 승만경 대승열반경 무상의경, 대법고경, 앙굴마라경 등이있고 법화경, 화엄경, 유마경 등도 이 계통의 경이라고 평천창 교수는 보고 있다.
여래장 계통에서는 일승(eka-yāna)사상이 설해지는데 성문/연각/보살의 삼승의 사람이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悉有佛性說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여래장경의 설명을 몇 가지 살펴보자.
“일체중생에게는 여래장이 있으며 중생이 아무리 윤회를 되풀이하고 번뇌에 오염되더라도 여래장은 오염되지 않고 소실되지도 않는다.” “일체중생의 탐진치 등 갖가지 번뇌 중에는 여래의 지혜, 여래의 눈, 여래의 몸이 있어서 결가부좌하여 엄연부동하다”(大正16, 457 中下)고 이 여래장을 아홉 가지 비유로 밝히고 있다. “여래장에는 생사가 없다. 여래장은 유위의 상을 떠나 있으며, 상주불변하다. 따라서 여래장은 依․持․建立이다” 여래장경의 이런 설명만 보더라도 여래장과 아뜨만을 구분지을 근거를 발견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리고 승만경에 의하면 여래장에는 空/不空의 두가지 의미가 있다. 여래장이 미혹과 깨달음의 근거라는 점에서 더러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공의 성질이 없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와 동일한 무량무변의 공덕과 그 본성이 변치 않는 불공의 성질이 없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 공/불공여래장설은 베단따학파에서 주장하는 아뜨만-브라흐만의 니르구나(nirgun*a)브라흐만과 사구나(sagun*a) 브라흐만설과 동일하다. 아뜨만은 모든 유위를 초월했고 초월했다는 언설자체도 붙을 수 없는 경지(니르구나= 공덕아님)이지만 동시에 만덕을 구족해 있는 자리(사구나=공덕을 갖춤)라는 것이다.
그래서 平川彰 교수도 자아(아뜨만)과 여래장의 차이를 밝히기란 쉽지 않다고 고백하면서 “여래장은 존재론적으로는 아뜨만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인식론적 실천적으로는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불교의 공의 입장이다”고 제안하고 있지만 설득력은 그리 강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 발제자의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보조사상연구원 실장인 인경스님의 견해를 잠시 인용해보자. 인경스님은『위빠사나와 간화선』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런데 이런 蘊/處/界의 존재를 중심으로 법체계를 완성한 아비달마 불교를 염두에 둔 대승불교, 특히 中觀思想은 현상의 존재(法有)마저도 부정하는 法無我의 입장을 견지한다. 곧 空思想에 의해서 초기불교의 인식론적인 구조를 해체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대승의 唯識佛敎와 如來藏思想은 <中論>의 空思想에 바탕을 두면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자아(我)와 세계의 현상(法)이란 阿賴耶識이 전환된 모습(轉變)이고,<<주1>> 十二處, 十八界, 五蘊이 바로 如來藏이라는<<주2>> 새로운 해석체계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부정했던 인식 주체를 인정한 듯한 이런 대승불교의 개념들은, 초기불교의 입장을 고수하는 이들로부터, 초기불교의 無我說에 위배되는 새로운 자아의 개념을 다시 불교에 도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나 비판이 야기되었다.<<주3>> 이 문제는 현대적인 관점뿐만 아니라,<<주4>> <楞伽經>이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AD4세기에도<<주5>> 역시 중요한 쟁점 사항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사람들도 ‘如來藏’에 대해서 外道들이 설하는, 불변하고 항상 존재하는 ‘我(Ātman)’와 동일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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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世親, <唯識三十頌> 第一偈頌,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주 2. <首楞嚴經>(卍續藏17, 700), “阿難云何五陰 本如來藏妙眞如性"
주 3. 바로 이점을 내세워서, 초기불교를 강조하는 이들은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불교의 교설이 아니라는 식으로 극단적인 비판을 한 경우도 있다. 이런 비판은 학문적인 논쟁을 넘어서, 문화적인 갈등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현실은 우리 시대의 과제로서, 진지하게 수용하여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 4. 대승불교와 선사상에 대한 이런 비판은 松本史朗의 『緣起と空-如來藏思想批判』(大臟出版, 1989)와 『禪思想の批判的硏究』(大臟出版, 1994), 袴谷憲昭의 『本覺思想批判』(大臟出版, 1989)이 출간되면서 시작되었다. 이것에 관한 국내의 논문집은 『비판불교의 파라독스』(고려대장경연구소, 2000)가 있다.
주 5. 舟橋尙哉, <初期唯識思想の硏究> (東京: 國書刊行會, 昭和51), pp.367-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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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제는 거듭 주장하고 싶다. 부처님께서는 와서보라(ehipassika)고 하셨다. 불성, 자성청정심, 진여, 불성은 와서 보라할 것이 아니다. 와서 믿어라고 할 뿐이다. 너에게 불성이 있다는 믿음일 뿐이다. 그래서 평천창 교수는 범부에게 있어서 여래장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존재를 믿고 수행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불성은 관념(산냐)놀음으로 치딜릴 수밖에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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