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그것은 바른 행위라는 뜻으로이해해도 되겠다.그렇다면 이 덕목이 어린이들에게 요구되는 까닭을 알 수 있거니와, 한편으로는 성자에게도 요구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 명백하지 않겠는가. 바른 행위란 누구에게나 필요한 덕목이며, 성자 또한 인간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을 설정하고 들어간다면, 신이란 모든 미덕을 구비한 절대자로 생각되므로 신에게는 어떠한 과오도 있을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러나 붓다는 신의 개념을 배척하였다. 있는 것은 인간이며, 이 인간으로서 옳바르게 살아가는 것 만이 문제가 된다고 할 때 인간으로서 이제는 과오가 절대로 없다는 경지가 있을 수 있겠는가?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붓다는 명백히 그런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붓다도 끝없이 정진을 계속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일 수는 절대로 없다. 더욱이 이제부터 어떤짓을 하든 관계없다는 그런 경지가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앞에 놓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후세 불교인들이 취했던 행동이다. 이른바 깨달았다는 사람 중에는 가끔 엉뚱한 짓을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그런 행위까지도 그것이 보살행인 까닭이라느니, 대승이기 때문이라느니 하여 변호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붓다의 생애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붓다의 일생 중에 그 무슨 기행, 기언이 있었는가. 붓다가 저자에 나타나서 덩싫덩실 춤을 춘 적이 있는가.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기방에 출입한 적이 있는가. 한시라도 수행을 그친 적이 있는가. 우리는 그 분의 생애가 어느 비구보다도 진지하고 엄격한 그것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어느 유명한 중이 아니라 붓다 그 분이어야 한다. 깨달았다고 해서 단정한 행위가 필요치 않다는 논리는 결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또 생각나는 것은 계율의 문제이다. 단정이란 결국 계율울 지키는 일이려니와 지금의 불교계는 과연 어떤가? 승려가 아내를 얻고 ,술과 고기를 먹고, 재물을 탐하고... 그러면서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언필칭 '대승'이라는 한 마디 말이다. 즉 그들은 상구보리만 아는 소승과 달리 하와중생을 하고 잇는 대승이기 때문에 방편상 그런 행위도 용인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남을 교화한다는 말인가. 또 열반에 이르는 성자라고 해도 자칫하다가는 범부의 경지로 전락하기 쉬운데 범부인 주제에 어찌 남을 구하는 방편으로 계율을 파괴해도 마음의 청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인가. 술을 마시고 색에 빠지는 것이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이 되고, 그러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않는다면 그 사람은 필시 붓다보다도 더한 성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기만에 누가 속는가. 세상사람들은 그런 승려들을 볼 때 비웃고 개탄하고 불교 자체까지도 의심하려고 든다, 그들이 어찌 그런 행위에 의해 교화되랴. 그러므로 이 단정이라는 덕목은 얼른 보기에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몸과 마음이 청정을 요구한다는 의미에서 불교의 안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불교는 이것을 위해 있는 것이며 이것이 상실될 때 불교는 죽는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 터이다.
다음에 요구되는 것은 좋은 말을 할 것, 유화할 것, 거만하지말것 따위의 덕목이다. 이 중에서 특히 거만은 깊이 경계해야할 일임에 틀림없다. 누구나 높은 경지에 이르고 나면 흔히 남을 내려다보기 쉬운 까닭이다. 이 점에서도 붓다는 영원한 본보기이다. 대중앞에 나서서
"그 동안 나의 언어와 행동에 그 무슨 잘못은 없었던가? 만일
조금이라도 그런 것을 보고들은 사람이 있다면 벗들이여, 나를
가엾이 알아 부디 지적해 달라."
고 자자(自恣)할 때의 붓다를 생각하라. 조그만 것을 이해했고 깨달았다고 해서 어찌 거만할 수 있겠는가.
또 "족한 것을 알고 과욕(寡慾)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옛날 용어로 말한다면 지족(知足)과 이양(易養)이다. 내가 어릴 적에 나의 부친은 '지족사'라는 절의 주지로 있었다. 나는 그 절의 이름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조금도 그럴듯한 맛, 절다운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뜻밖에도 매우 중대한 덕목임을 깨닫게 된 것은 요즘에 들어서의 일이다. 지족을 주장하는 데는 동서의 차이가 없는 줄아나, 역시 이것을 가장 강조하는 것은 불교인 것 같다. 지족이니 과욕이니 하는 것은 결국 최소한도의 생활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생활에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곧 탐심을 낸다는 말이 되는 까닭이다. 욕망이란 끝이 없으며 말을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이런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불교이매 한 벌의 옷과 한 끼의 밥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그는 결코 진정한 도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도의 유무를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으로서 그 사람이 얼마나 과욕할 수 있는지를 보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조금도 잘못이 아니라고 자처한다.
서두라고도 할 덕목에 대한 설명이 좀 장황해진 느낌이 없지 않거니와 이 경은 결국 자비행에 앞서 불교인으로서의 자기를 확립하라고 요구하고 잇는 것이겠다. 대승이 주장하고 있는 말을 빌린다면 먼저 상구보리를 하여 진리를 확고히 파악하고 난 다음에 하화중생을 실천하라고 하는 것이 다름아닌 붓다의 뜻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결코 自利와 利他보다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자리와 이타는 본래 경중을 따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정말 추호의 사심도 없는 자비행으로 남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확립이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 경의 주장인 줄 안다.
여기서 본론으로 들어가서 자비란 무엇인가? 그 본질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 경의 도처에 그것이 언급되어 있지만 그에 앞서 나는 이 말 자체의 뜻을 파헤쳐 보고 싶다.
'慈'라는 말은 팔리어에서는 metta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어로는 maitrey라고 하며, 그 어원을 캐어 보면 mitra벗에서 온 것임을 알게된다. 그것이 팔리어에서는 mitta벗이되고 다시 추상화되어 metts우정으로 발전하여 그것이 '慈'의 뜻을 지니기에 이른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어학적인 것을 장황히 늘어 놓는 것은 물론 현학적인 취미 때문만은 아니다. 나도 그런 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바이지만, 어떤 기회에 그런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이 나에게 이 덕목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 준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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