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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옮기기65회(오늘은 부처님오신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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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원함으로써 사람은 비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며, 능히 인간 본능의 사랑으로부터 비약하여 신적인 사랑으로 지양될 수 있다고 그들은 본다. 이리하여 그들은 인간 본능의 사랑을 에로스라고 일컫는 데 대해 이런 신적인 사랑을 아가페라고 불러서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사랑의 전인류적 확대 과정은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이었다는 것에 그 특징이 있다. 그런 뜻에서 불교적인 사랑 즉 완전히 휴머니스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휴머니즘의 근본 정신은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무엇이거나 나와

관계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 한 데렌티우스(Terentius,ab,195~59.B.C)의 말속에 잘 나타나 잇다고들 한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붓다의 길은 자기에게 전념하고 자기의 깊은 내부를 향해 침잠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서 얼른 보기에 인간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듯이도 보이리라. 그러나 매우 역설적인 말이긴 해도, 사람이란 자기의 내적 심층에 침잠했을 때에야 비로서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아 그들도 또한 나처럼 인간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있구나! 이런 사실을 진정으로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자기 침잠의 심층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몸의 진상을 투시하여 그 위에 눈물을  뿌릴 수 있는 사람만이 비로서 남의 처지에 대해서도 눈물을 뿌릴 수 잇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동고동비(同苦同悲)의 감정이라는 것도 이런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비의 샘이 끊임없이 샘솟아 나올 수 잇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慈'라는 말이 '우정'도 뜻한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매우 의미 심장하게 느껴진다. 인간의 생존 양상이란 천차만별이다. 어떤 사람은 제왕으로서 만인 위에 군림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노예로서 일생을 매어 지내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억만장자가 되어 주지 육림에 파묻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일간 두옥도 없어서 거리를 방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인간성의 심층에 침잠하여 바라보면 인간이란 똑같이 생로 병사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등에 걸머지고 언제 닥쳐올지도 모르는 죽음 앞에 벌벌 떨고 있는 가엾은 존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점에 눈 뜰 때, 우리 앞에서는 제왕이니 노예니 가난뱅이니 부자니 하는 차별이 완전히 무의미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이란 본질적으로 평등하여 누구나 친구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이 동고 동비의 정으로 연결될 때 거기에서 솟아나는 사랑의 샘이란 우정 그것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여기에서'자'가 '비'라는 글자와 만나 '자비'라는 숙어를 이루는 것이 상례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비'는 karuna의 역어이어서 본디 '신음'을 뜻하는 말이다. 남이 괴로워서 신음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가엾은 생각을 지니게 되거니와, 이 공감이 바로 '비'의 내용이다. 중국의 주석가는 '자비'의 뜻을 설명하여 "애련(愛憐)을 자라 하고 측창(側愴)을 비라 한다."고 했고, 팔리어 주석서에는 "자란 福善을 주려고 하는 마음이요, 비란 怨苦를 제거하려는 소원"이라고 했다. 어쨋든 '자'는 '비'와 결부됨으로써 그 적극면과 소극면을 구비하게 되는데, 내 사견으로 이 양면의 중량을 비교하자면, 그 비중은 오히려 '비'쪽으로 기우는 듯이 생각된다.

 

생각건대 우리 인간의 생존 양상이란 슬픔으로 차있다. 평화를 갈구하면서도 불안에 떨어야 하고 자유를 바라면서도  구속 속에서 허덕여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천명을 다하고자 원하면서 자주 죽음 앞에 떨기도 하고 생을 충실히 살아 가고자 하지만 게으름이 우리의 나날을 좀먹기도 한다.

 

이런 자기의 슬픈 양상을 깊이 통찰하고 우연히 고개를 들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 눈에 비치는 것은 역시 자기처럼 불안에 떨고 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실에 눈 뜰때 저절로 우리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이 동고동비의 감정이다. "측창을 비라한다."는 말을 바로 이것을 이름이다. 그리고 이 슬픔의 감정이 이상한 힘을 발휘하여 우리 마음 속에서 보편적인 사랑을 일깨우게 된다. 거기에 무엇인가 인간의 기미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옛 사람들이 인간을 가리켜 "비기(悲器)"라고 한 것도 이런 점을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낡은 경에

 

"삼세의 모든 세존은 대비(大悲)로 근본을 삼는다."

 

라고 한 것도 역시 같은 뜻이다. 이제 붓다는  이 "자경"에서

 

"일체의 생명 모든 사람에게 행복이 있으라. 평화가 있으라.

 은혜가 있으라."

 

고 외도록 설하셨다. 그 목소리도 나에게는 눈물에 젖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인간의 슬픔을 그 분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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