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하여 재인식하게 된 '자''의 뜻을 말하기 위해 나는 그런 언어학적인 면까지 언급하게 되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이 '자'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대치시켜도 무방하다. 현대인들에게는 이쪽이 훨씬 신선하고 매력이 있으며 이해에 도움이 될른지도 알 수 없겠다. 내가 이 책에 '지혜와 사랑의 말씀'이라는 제목을 풑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를 '사랑'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기에 앞서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잇다. 불교에서는 '사랑'의 쓰임새가 매우 다양할 뿐더러 부정적인 뜻으로도 자주 쓰인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카마(kama)란 사랑이란 뜻이지만 그것은 감각적인 욕망을 가르키고 주로 성적인 사랑을 말한다. 또 탄하(tanha)도 사랑을 뜻하는 말이나 그것은 격렬한 욕망을 가리키는 데 쓰이여, 거기서부터 병적인 집착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사랑에 대해 붓다는 대개의 경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는 전장에서 파세나디왕과 왕비가 이야기한 것, 즉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다고 한 그 '사랑'의 원어는 피야(piya)인바, 그것은 자기를 중심으로하여 혈연, 친척에 연결되는 사랑이다. 그러기에 그것을 더 높은 차원으로 지양시키라고 일렀을 때, 붓다는 명백히 그런 사랑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것이 되는 줄 안다. 다시 [법구경]의 애품 (愛品; piyavagga)에서는 그런 사랑을 나타내는 낱말들, 즉 piya,pema,rati, kama, tanha따위를 나열하고 그 하나하나에 대해
사랑에는 근심이 생기고
사랑에는 두려움이 생기나니
사랑을 넘어선 사람에겐 근심없도다.
어디에 간들 두려움 있으랴.
라고 설하고 있다.
이렇게 불교에는 사랑에 대해 부정적으로 설한 말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국 사랑을 더 높은 차원으로 지양시키고자 했기 때문임을 간과한다면, 붓다의 참뜻을 오해한 것이 될 터이다. 붓다는 남녀의 사랑,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재물에 대한 사랑 따위를 근본에서 부터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인간이 인간 오릇함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목석과 같아 지라고 요구하는 것이며, 인간성 자체를 말살하는 결과가 되고 말리라. 그러기에 붓다는 그런 것을 더 높은 사랑으로 지양하라고 가르치기 위해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불순성을 부정했던 것이었다. 이것을 거듭거듭 주의할 필요가 있는 점인 줄 안다.
무릇 사랑이란 일종의 인력이다. 끌어당겨서 연결시키는 힘이다. 그러므로 이것 없이는 인간관계가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남녀가 서로 만나 한 가정을 이루고 남과 손을 잡아 친구가 됨으로써 서로 돕고 부모와 자식이 서로 사랑하고 제 조국을 사랑하고 세계 평화를 염원한다는 것, 이것들은 모두 사랑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란 그런 뜻에서 선악 이전 생명의 본원적인 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원적인 것이면 본원적인 것일 수록 그 작용은 분방하고 거칠기 마련이어서 그 자연적인 양상은 반드시 더할 나위 없이 착하고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다. 남녀의 사랑이라면 동물에게도 유사한 것이 있다. 부모자식 긴의 사랑은 조수에게도 있다. 가까운 것끼리 서로 끌고 맺어지는 것은 물리적 세계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이런 본원적인 사랑만이라면 그것을 반드시 인류 특유의 것이라고 자랑할 수는 없는 것이겠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사랑의 이런 본원적인 힘을 조정하고 지양시키고 확대해 가야 한다.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도덕이니 종교니 일컬어지는 것들은 항상 그런 노력을 하여 왔던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 중에서도 이런 사랑을 지양시켜서 일체의 생명과 모든 사람에게까지 확대할 것을 가르친 것은 불교와 기독교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 두 종교가 이런 전 인류적인 사랑의 이념을 창조하기 까지 이른 과정은 전혀 달랐다는 것을 나는 매우 흥미있게 생각하는 바이다.
기독교에서의 사랑의 전인류적인 확대는 신의 사랑의 모방으로서 제시되었다. 이른바 '산상수훈'의 일절은 이런 말을 전하고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되리니...."
여기에 기독교적 사랑의 기본 구조가 그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본능적인 사랑의 양상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고, 자기에게 가까운 이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자기자식을 사랑하고 자기 형제를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사랑한다. 그 사랑은 자기에게 가까울 수록 짙어지고 멀어짐에 따라 엷어진다. 원수에 대해서는 증오하는 것이 옳고 적과는 맹렬하게 싸울수록 칭찬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 그것은 완전히 인간의 본능적인 사랑에 역행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가? 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신의 사랑을 모방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이다.
"하느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바치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이와 불의한 이에게 내리우시나니 ,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
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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