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다팡하(16) 불공을 하는 이유-1
우리 한국에서는 부처님의 열반과 공양 올리는 것을 직접적으로 관련시켜서 문제를 제기하는 분은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49재를 올리고 영가(靈駕)를 천도하고 난 다음에 다시 천도재(薦度齋)를 여러 번 올리는 문제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즉,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49재를 잘 모셔서 완전히 천도(薦度)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그 아버님을 불러서 공양을 올릴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문이다.
49재를 통해서 천도가 되었다면 다시 천도재를 모실 필요가 없을 것이요, 그 전에 천도재를 모셨을 때 천도가 안되었다면 이번에 다시 천도재를 별도로 모신다고 해서 안 된 분이 어떻게 새로이 천도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들은 백일 지장기도를 위해 영가위패를 모시거나 백중 우란분재일에 천도식을 거행할 때도 제기된다. 물론 노보살님들은 마음속으로 질문이 있다고 하더라도 참거나 천도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의 성의로 여러 번 모시면 더 좋겠지 하는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영가천도에 매년 동참할 것이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오래된 영가의 위패를 모시면서 속으로 또는 겉으로 의문을 갖는 것을 종종 본다.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비구의 대화는 영가의 천도 문제가 아니라 열반에 드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문제를 가지고 대화한다. 하지만 이 질문을 응용하면 영가천도 문제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비구에게 묻는다.
스님, 만일 부처님께서 사람들이 올리는 공양을 받는다면 부처님은 완전히 열반에 들었다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공양을 받는 부처님은 아직 세상 안에 있고 세상에 묶여 있으면서 세상일을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일은 헛된 일이며 결과도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만일 부처님이 완전히 열반에 들어서 완전히 중생세간을 떠나셨다면 부처님은 공양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완전한 열반에 든 사람은 공양을 받지 않을 터인데 공양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은 쓸모 없고 결과도 없을 것입니다. 스님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은 밀린다 왕이 아직 {대승열반경}과 접촉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대승열반경}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인물의 열반을 통해서 일반적인 많은 부처님들이 세상에 머무는 것을 가르친다. 즉, 부처님의 몸이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항상 하시는 것이다. {법화경(法華經)}의 '여래수량품'에서 미친 아이들의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자극을 주어 약을 먹고 병을 치료하도록 짐짓 죽었다고 소문을 내지만 실제로는 죽지 않은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밀린다 왕은 열반에 드신 부처님이 공양을 받아도 문제요, 받지 않아도 문제이니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묻는다. 만약 열반에 드신 부처님이 공양을 받는다면 아직 완전한 열반에 들지 못했으니 일반 귀신과 다를 바 없어서 공양을 올린 효력이 없을 것이고, 완전히 열반에 들어서 고양을 받지 않는다면 공양을 받지 않기 때문에 공양을 올리는 일이 무의미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 질문을 받은 나가세나 비구는 부처님이 완전히 열반에 들어서 공양을 받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공양을 올리는 것은 일을 성취시키는 공덕이 된다고 설명한다.
부처님의 열반은 큰불이 꺼진 것과 같습니다. 불이 꺼졌을 때 거기에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완전한 고요의 바다에 드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공양을 받을 필요도 없고 공양을 받고자 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불이 꺼졌다고 해서 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서 연료를 모아놓고 마찰을 시켜서 불을 일으키면 불은 언제든지 다시 살아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일은 부처님의 완전한 열반에 관계없이 결과를 성취하는 공덕이 될 수 있습니다.
나가세나 비구는 부처님의 열반을 꺼진 불에 비유해서 문제를 풀어간다. 부처님의 열반은 불의 소멸과 같다는 것이다. 불이 완전히 꺼졌다는 것은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는 것을 뜻하고 다시 연료를 준비하고 불을 피울 때 다시 불이 살아나는 것은 열반에 드신 부처님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생의 요청에 감응해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완전히 열반에 드는 것과 공양을 받는 것 사이에 상충될 것이 없어진다.
밀린다팡하(17) 불공을 하는 이유-2
불의 소멸과 다시 켜지는 원리, 부처님의 의사가 아니라 중생의 필요에 의해서 불이 꺼진 상태와 켜진 상태로 바뀌어진다는 설명에 만족하지 못한 밀린다 왕은 다른 비유로 설명에 만족하지 못한 밀린다 왕은 다른 비유로 설명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나가세나 비구는 다시 모든 곡식을 키우는 대지에 비유하여 열반을 설명한다.
대왕이여! 이 세상에는 땅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땅 전체를 대지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대지에 종자를 뿌리고 농사를 짓습니다. 그렇다면 대왕이여! 저 대지가 모든 농부들을 보고 자기 몸 안에 씨앗을 뿌려서 자라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까? 모든 농부들은 대지의 필요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부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대지에 씨앗을 뿌리고 농사를 짓습니다. 열반에 드신 부처님은 대지와 같습니다. 부처님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은 중생들이 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의 필요에 의해서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에게 소원을 사뢸 뿐입니다. 부처님은 단지 자비심으로 중생의 요청에 감응할 뿐입니다.
나가세나 비구가 여기서 부처님의 열반을 다시 한번 쉽게 풀이한다. 열반에 든 부처님을 대지에 비유하고 공양물을 씨앗에 비유하고 공양 올리는 사람들을 농부에 비유한다. 열반에 든 부처님의 고요는 대지의 정적과 같다. 대지는 있는 그대로 편안하다. 대지에 농사를 짓는 것은 농부들이다. 농부들의 필요에 의해서 씨앗은 대지의 몸 속으로 뿌리를 내린다. 부처님은 그것들을 받아줄 뿐이다. 대지가 농부의 요청에 응하듯이 열반에 드신 부처님도 공양을 올리면서 발원하는 중생들의 요청에 응한다. 중생의 공덕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밀린다 왕은 다시 비유를 들어 설명해 달라고 부탁한다. 나가세나 비구는 북소리의 비유를 든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큰북을 쳐서 소리를 낸다고 합시다. 북소리는 즉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전에 울렸던 북소리가 다시 울리겠습니까? 이미 사라진 북소리는 다시 울리지 않을 것이고 다시 울릴 생각이나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큰북은 소리를 울리기 위한 도구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가 필요로 할 때, 자신의 노력으로 큰북을 쳐서 소리를 울립니다. 열반에 드신 부처님도 소리를 내는 북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북소리가 이미 끊어졌지만 중생이 그 북을 두들기면 중생의 필요에 의해서 부처님은 감응하여 소리를 낼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은 무용한 것이 아니며 반드시 성취의 씨앗이 되는 공덕이 됩니다.
부처님이 소리를 내다가 소리를 쉬어 버린 북으로 비유된다. 소리를 쉼으로써 완전한 열반에 들었지만 중생이 필요에 의해서 공양을 올리고 소원을 빌면 언제라도 북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양을 올리는 것은 틀림없이 공덕이 된다는 설명이다.
밀린다팡하(18) 무심과 자비-1
부처님은 일체의 좋아함과 싫어함을 떠난다. 기분이 좋다고 해서 복을 주거나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벌을 주는 일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부처님께서 사리불존자와 목건련존자를 설법장에서 여러 대중들과 함께 퇴장시킨 일이 있다고 전해진다. 밀린다 왕이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냄을 완전히 여의었다고 하는 부처님이 화를 내고 제자들을 법회장에서 쫓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기분에 따라서 변덕을 부리는 인격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도 인간세계를 초월하는 인격체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 인격체는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주질서 그 자체일 뿐이다. 어떤 이에게 좋은 일이 생겼거나 나쁜 일이 생겼을 경우 그것은 그 사람이 우주질서에 합당하게 행동했는지 여부의 문제이지 부처님의 기분 문제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불교의 원칙은 인격적 변덕을 떠난 무심(無心)의 자비(慈悲)이다.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비구에게 묻는다.
스님, 여래는 역정이 나서 제자들을 퇴장시킨 것입니까? 혹은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제자들을 퇴장시켰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만일 부처님이 화가 나서 제자들을 퇴장시켰다면 그것은 여래가 아직도 노여움을 끊지 못하고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만족해서 제자들을 퇴장시켰다면 부처님은 근거 없는 사실에 대하여 확실히 알지도 못하고 사람을 퇴장시키는 경거망동을 한 셈입니다.
왕의 물음에 나가세나 비구는 대답한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존자와 목건련존자를 설법하는 장소에서 퇴장시킨 일은 있었지만 부처님이 역정이 나셔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대왕이여, 어떤 남자가 길을 걷다가 나무뿌리나 돌멩이에 발이 걸려서 넘어졌을 때 그 대지가 노해서 그 남자를 넘어뜨렸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대지는 노여움도 기쁨도 없고 사랑하고 미워할 것도 없습니다. 남자가 자신의 부주의로 넘어졌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래에게는 노여움도 기쁨도 없습니다. 사리불존자와 목건련존자는 자신의 문제로 퇴장당한 것입니다.
나가세나 비구는 부처님을 대지에 비유한다. 대지를 걷다가 돌멩이에 걸려서 넘어진 이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문제로 넘어진 것이다. 길을 가다가 넘어지는 일을 땅이 책임질 이유는 없다. 사리불존자나 목건련존자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설법장에서 퇴장당했다면 그것은 그들의 허물 문제이지 부처님의 감정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대지와 같은 부처님은 무심(無心) 그 자체이기 때문에 특정한 일, 특정한 사람으로 인해서 기분이 좋아지거나 나빠지는 일도 없고 자신의 기분에 의해서 복을 내리거나 벌을 내리는 일도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밀린다 왕은 다른 비유로 설명해 달라고 한다. 나가세나 비구는 바다의 비유를 들어준다.
대왕이여, 큰 바다는 죽은 시체와 공존하는 일이 없습니다. 바다 가운데 시체가 있으면 반드시 그 시체를 밀어내어 바닷가에 옮겨놓습니다. 바다가 노해서 시체를 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는 싫어하고 좋아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리불존자와 목건련존자도 자신의 문제로 퇴장당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노여움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쉬운 비유로 부처님의 입장을 설명해 준다. 바다가 시체와 같이 있지 못하는 것은 바다의 특성이다. 시체가 생기면 바다는 그 시체를 바닷가로 밀어낼 뿐이다. 바다에서 헤엄치지 못하고 죽어서 시체가 되는 것은 바다의 책임이 아니다. 바다가 어떤 시체는 밖으로 밀어내고 어떤 시체는 밖으로 밀어내지 않는 것 같은 차별적인 선택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바다에서 밀려나는 것은 사람의 문제이다. 시체가 된 사람의 문제라는 것이다.
밀린다팡하(19) 무심과 자비-2
부처님에 의해서 사리불존자와 목건련존자가 설법장에서 퇴장당한 사실은 선생님에 의해서 말썽을 피운 학생들이 교실 밖에 나가 손을 들고 서있는 정도의 벌과 같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일이지만 밀린다왕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도 '부처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나?'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항상 고요한 얼굴과 마음을 가지시고 자비로만 중생을 대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자비는 기계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근기에 응해서 중생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조치를 내리는 방편의 조치를 내리는 방편의 자비이다. 그 방편의 자비는 보통 자비의 행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위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절집에서는 이 교화방편이 '혹자혹위(惑慈惑威)'라는 전문적인 술어로 표현된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한 제자가 있었는데 너무도 머리가 나빠서 자기 이름자도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다. 성을 외우면 이름을 잊어버리고 이름을 외우면 성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부처님은 그처럼 멍청하고 답답한 제자를 혼내는 일이 없었다. 아무리 어리석은 일을 해도 내버려두었다.
어느 날, 부처님은 그 머리 나쁜 제자에게 일체의 다른 일은 그만두고 오직 마당을 쓰는 일만 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제자는 매일 마당을 쓰는 가운데 차츰 정신이 맑아졌다. 마침내는 열심히 수행해서 아라한과를 얻게 되었다. 근기가 약한 제자에 대해서도 부처님은 무한한 인내심과 이해심과 방편력이 있었다.
하지만 사리불존자는 지혜제일이요, 목건련존자는 신통제일인 제자이다. 부처님이 아끼는 수제자들인 것이다. 부처님은 근기가 수승한 제자들을 지도하는 데 보다 높은 기준을 쓰시는 것이다. 위엄의 방편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어떤 기회에 두 수제자를 설법장에서 퇴장시켰던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 자비의 표현이었다.
부처님께서 어떠한 자비의 교화방편을 쓴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불교의 기본원칙을 벗어날 수 없다. 부처님이 기분 내키는 대로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대지가 하는 일과 같고 바다가 하는 일과 같다고 할 것이다.
대지는 특별히 좋아하는 씨앗과 싫어하는 씨앗이 없다. 자신의 몸에 뿌려지는 씨앗은 씨앗의 성질 그대로 싹을 틔게 할뿐이다. 대지를 걷는 사람이 자신의 힘에 의해서 달려갈 수도 있고 천천히 걸어갈 수도 있다. 또 돌에 걸려서 넘어질 수도 있다. 그것은 순전히 사람의 문제이지 대지의 문제가 아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님이 사람에 따라서 차별적으로 규율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질서의 원칙은 항상 그대로 있고 사람이 그것에 순응하느냐 어긋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부처님은 하나의 거울로서 웃는 얼굴이 오면 웃는 얼굴을 비춰주고 찡그린 얼굴이 오면 찡그린 그 표정 그대로 비춰 줄뿐이다. 그러면서도 중생을 향한 자비심과 선교방편(善巧方便)이 항상 베풀어지고 있는 것이다.
밀린다팡하(4,5,6,7) (0) | 2009.0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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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다왕문경-귀경게---2 (0) | 2009.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