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다팡하(8)-육신이 중요한 이유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궁극 목적인 열반과 해탈을 얻는 일 외에 육신이나 복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를 풀어보자. 그리고 해탈한 사람이 괴로움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비구에게 묻는다.
“스님, 출가한 수도승에게도 육신은 소중합니까?”
“아닙니다. 출가한 수도승은 육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왕이 또 묻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비구들은 육신을 아끼고 사랑합니까?”
비구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바로 되묻는다.
“대왕이여, 그대는 싸움터에 나가 화살을 맞은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왕은 화살 맞은 경험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비구가 날카롭게 묻는다.
“그렇다면 그 상처에 고약이나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는 것은 그 상처가 소중해서였습니까?”
그러자 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는 것은 상처가 부풀어 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비구가 왕의 처음 질문에 답을 한다.
대왕이여! 상처가 났을 때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붕대로 감는 것은 상처가 소중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출가수행자에게 있어서 육신은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출가 수행자는 육신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맑고 깨끗한 수행을 위해서 육신을 유지할 뿐입니다. 세존이 가르치셨듯이 육신은 상처와 같은 것입니다.
나가세나 비구의 비유는 정말 천재적이다. 수행자들이 육신을 소중히 하는 것은 육신이 소중해서가 아니라 육신이 문제를 일으키면 수행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밀린다 왕은 여기서 수행승의 육체 문제를 물었지만 이와 같은 의미의 질문은 재가불자에게도 던질 수가 있다. 재가불자들은 어차피 육신을 소중히 해야 하니까 수행승에게 묻는 질문을 다시 물을 필요는 없겠고 세속적 복덕에 대해서 물을 수가 있다.
부처님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공(空)을 말씀하고 또 무소유(無所有)의 자유를 찬탄한다. 불제자라고 하면 무상(無常), 무아(無我), 공(空), 무소유(無所有)에 대해서 한번쯤은 듣고 생각해 보게 된다. 밀린다 왕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당신네 불교도들은 복덕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복덕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기복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무소유의 해탈을 주장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면서 실제로는 복덕을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세나 비구의 논법이라면 우리 기복 불교신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상처가 중요해서 상처를 잘 모시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상처를 잘 감싸듯이 복덕이 소중해서 복덕을 구하고 복덕을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중생세간에 살면서 복덕이 없으면 남에게 폐만 끼치고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상처를 감싸듯이 복덕을 감싸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복을 구하고 돈을 모으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마음가짐에 있어서 재물, 명예, 권력 등을 어떤 상처처럼 생각해야 한다. 상처처럼 재물을 생각할 경우 그것을 귀히 여기고 조심스럽게 다루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초월해서 궁극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또 왕은 비구에게 해탈한 사람도 고통을 느끼느냐고 묻는다. 비구는 육체적인 고통은 느끼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왕이 이유를 묻자 비구가 대답한다.
“대왕이여, 해탈한 사람에게 있어서 육체적인 인연은 계속되지만 정신적인 고통의 인연은 끝나기 때문에 육체적인 고통은 느끼고 정신적인 고통은 느끼지 않습니다.”
해탈한 사람은 육체적인 고통은 느끼면서도 정신적인 고통은 느끼지 않는다는 말은 선종에 있어서 '불매인과(不昧因果)' 즉 '인과를 받으면서도 인과에 미혹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나쁜 일을 하면 그 과보(果報)로 고통을 당하게 되지만 존재의 실상을 깨쳐서 여실히 관찰하기 때문에 육체적인 괴로움을 당한다고 해서 정신까지 괴로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밀린다팡하(9) 시간의 끝-1
{밀린다팡하}에서 불교는 시간의 시초 또는 우주의 시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또는 아닌지 그리고 해탈한 이는 시간 속에 있는지 아니면 밖에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비구에게 우주 최초 시간의 출발점에 대해서 묻는다. 우주가 있어서 시간이 있을 수 있고, 시간이 있어야 우주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의 출발점을 따지면 자연히 우주의 처음에 대해서 문제를 삼게 된다. 밀린다 왕의 최초 시간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나가세나 비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최초 시간의 근거는 미혹무명(迷惑無明)이다. 미혹무명으로 인해 업이 있고 업으로 인해 인식이 있고... ..."
이런 식으로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이야기한다. 왕은 시간의 최초를 물었는데 나가세나 비구는 엉뚱하게도 십이연기(十二緣起)를 그 근거로 댄다. 미혹무명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은 결국 '시간의 최초는 우리가 미혹해서 짐작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는 '사람들이 미혹해서 마음대로 시간을 정할 뿐이니 그 물음 자체에 시간이 실제로 있다는 전제가 숨어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흔히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하고 의심을 가진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타종교에서는 우주의 최초가 어떻게 태어났는가에 대해서 유식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조물주 신이 있어서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인들에게 핀잔을 준다. 불교에서는 멍청하게도 우주의 시작도 모른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만동자가 부처님에게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 질문하니 부처님이 침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어떤 타종교인들은 그 말을 인용해서 '부처님은 인간이니까 우주의 시초를 모를 수밖에 없다. 우리 종교의 교주는 신이어서 우주의 시작을 알 뿐 아니라 바로 자신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타종교인들이 이런 말을 하면 많은 불교인들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정말 그런가?'하고 멍하니 있다.
그러나 타종교인들이 창조를 말하면서, 우주의 시초를 안다고 하는 것에는 큰 허점이 있다. 우주의 창조를 말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창조를 말하는 사람들은 창조에 대해서 끝까지 말해야 한다. 즉, '우주를 창조한 신은 누가 창조했느냐?'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들은 그것도 신이 창조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그 이전의 창조자에 대해서 묻게 될 것이고 그들은 끊임없이 그 앞의 창조자가 창조했다고 말할 것이다. 결국 무한으로 이어지게 된다. 무(無)자가 나온다는 말이다.
끝까지 물어도 답할 것이 없기 때문에 무한으로 올라가는 것은 '모른다'는 말과 같게 된다. 어쩌면 그들은 이렇게 둘러댈 수도 있다. '창조자는 신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고 말이다. 이 말은 '우리는 우주의 창조에 대해서 또는 시간의 시초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과 같다. 그들이 아무리 별 말을 꾸며대 보아도 공연히 자기가 모르는 가공인물을 내세워 '나는 모르는데 그는 안다더라.'고 미루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자기 종교 내에서 자기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문제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이 불교인들에게 시간의 시초나 우주의 시초에 대해서 아는 척하고 불교를 비방할 수 없다는 말이다.
도교의 노자는 없을 무(無)자에서 있을 유(有)자 유가 나오고, 유로부터 하나가, 하나로부터 둘이, 둘로부터 셋이, 셋으로부터 만물이 나왔다고 한다. 이 구도는 유를 말하고 숫자를 말하니까 우주의 최초에 대해 무슨 설명이 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시간의 끝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이 된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알 수 없는 없을 무(無)자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없을 무(無)자로 시작한다는 것은 '모른다'는 말과 같다. 최초의 창조주를 무한히 추궁해 나가는 것도 결국 무한할 무 또는 없을 무자(無字)로 끝나고 만다. 이 무자는 노자가 우주의 최초라고 하는 무자와 다를 바가 없다. 시간의 최초에 대해 서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밀린다팡하(10) 시간의 끝-2
그러면 다시 왕과 비구의 대화로 돌아가서 나가세나 비구의 설명을 들어보자. 왕은 시간의 최초는 알 수 없다는 비구의 말을 듣고 비유로 설명해 달라고 부탁한다. 비구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 조그만 씨앗 하나를 땅에 심는다고 합시다. 그 씨앗은 싹이 터서 점차로 성장하고 무성하여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씨앗을 받아 다시 땅에 심으면 또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개체적 씨앗의 연속은 끝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시간의 최초는 끝이 없습니다. 씨앗과 싹과 열매가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에서 그 최초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듯이 시간의 끝을 잡고자 하는 것도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말에 흡족하지 않은 왕은 다른 비유를 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비구는 다시 이런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닭이 알을 낳고 그 알에서 닭이 생기고 또 그 닭에서 알이 생깁니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이 끝이 없습니다. 시간도 무한한 반복입니다. 그 끝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합니까. 아직 미심쩍어하고 있는 왕을 보고 나가세나 비구는 땅에다가 원을 하나 그어 놓고 왕에게 "이 원의 둘레는 끝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왕은 물론 원둘레의 끝은 없다고 답한다. 비구는 왕의 말을 받아서 "원과 같이 시간은 시작도 끝도 잡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우주의 최초 또는 시간의 끝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다. 첫째는 부처님이 택한 방법으로 침묵하는 것이다. 이 침묵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오직 수행과 중생구제만 생각하는 실용주의 태도이다.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생사를 해탈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부처님은 최초의 시간에 대해서 답변할 아무런 필요나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 나가세나 비구의 답변방법이다. 시간은 둥근 원둘레의 반복적 순환과 닭과 달걀의 반복적 순환과 같아서 그 끝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가세나 비구는 우주의 시간과 사물은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순환하는 상태에 있다고 답하는 것이 된다.
셋째는 용수보살의 답변방법이다. 용수보살은 먼저 질문의 전제 문제에 대해서 말을 시작할 것이다. 시간의 시작을 묻는 것은 시간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시간이 실체적으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상(無常), 무아(無我), 공(空)사상의 원칙은 시간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용수보살은 그의 네 가지 부정방법을 쓸 것이다.
시간이 있다면 시간의 없음도 있을 것이니 '간과 무시간은 같으냐 다르냐,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느냐, 또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느냐.' 같은 형식이 될 것이다. 누가 우리에게 최초의 시간에 대해서 물어 왔을 때, 용수보살식의 답변방법을 쓰자면 상당한 논리가 필요하고 또 복잡하다. 부처님의 침묵방법을 쓰면 상대는 우리가 시간에 대해서 몰라서 그러는 줄 잘못 알고 계속 추근대며 귀찮게 굴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나가세나 비구의 방법이다.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순환하기 때문에 그 시작과 끝은 잡을 수 없다고 답하는 것이다. 상대가 창조를 내세우면 그 창조자는 누가 창조했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결국 닭과 달걀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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